[O2/Issue]납조끼 입고 지옥훈련 넘는다면 한국 선수도 솟지 못할 이유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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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대만계 선수 돌풍으로 본 동양인의 점프력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가로채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 골밑까지 도달한다. 그러고 점프, 순간 미국프로농구(NBA) 뉴욕 닉스의 홈구장인 매디슨스퀘어가든을 가득 채운 팬들의 입이 쩍 벌어진다. 앳된 얼굴의 동양인은 자신보다 20cm 이상 큰 흑인 선수 두 명을 앞에 두고 더블 클러치(공중에서 몸이 뜬 상태에서 한 번 더 점프하는 동작) 슛을 성공시킨다.

몇 분 뒤 그는 환상적인 덩크슛까지 터뜨린다. 키 191cm에 ‘불과한’ 그가 마치 시간을 정지시킨 듯 공중에 떠오르자 누구도 막지 못했다. 경기가 끝날 무렵 홈팬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외친다. “MVP, MVP!”

○ 동양인도 점프를 할 수 있다

며칠 뒤인 이달 16일 뉴욕타임스는 그와 관련해 큼지막한 제목을 뽑았다. ‘동양인도 점프를 할 수 있다(Asian Men Can Jump).’

주인공은 대만계 미국 선수인 제러미 린(24). 혜성처럼 등장해 팀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그는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주간 최우수선수(MVP)로 뽑힐 만큼 실력도 발군이지만 그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검투사’ 같은 이미지로 미국 농구계의 오랜 편견들을 깨뜨려서다.

린은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농구에서만큼은 철저히 비주류인 하버드대 출신 모범생이 NBA에서 활약을 펼친다는 이유만으로도 상품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농구, 그것도 가드 포지션에서 동양인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동양인이 농구에서 흑인 선수와 ‘맞짱’을 뜬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린의 등장으로 최소한 이러한 의문을 품어볼 수는 있게 됐다.

1992년 개봉한 ‘백인은 점프를 할 수 없다’(WHITE MEN CAN’T JUMP, 한국 개봉 명 ‘덩크슛’)란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길거리 농구를 하는 주인공 백인에게 흑인들은 이렇게 비아냥댄다. “너는 점프력이 부족해서 절대 농구를 잘할 수 없어.”

흑인들의 탄력은 엄청나다. 흑인 농구 스타들의 경우 제자리뛰기(서전트 점프)가 80cm 이상 되는 선수가 즐비하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49)은 서전트 점프가 110cm에 이르렀고, 키가 168cm에 불과한 스퍼드 웹(49)도 무려 120cm 이상 하늘로 솟구치며 덩크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일반 성인 남자의 서전트 점프 평균이 30∼40cm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이다.

○ 흑인 근육은 말 근육?

흑인들의 특별한 점프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분이 크다.

일단 근육의 비율과 생김새부터 다르다. 미국의 한 대학 연구기관이 조사한 결과에서 백인이나 동양인의 경우 탄력 및 순발력에 관여하는 백근(白筋)과 지구력 등에 관여하는 적근(赤筋)의 비율이 5 대 5인 반면, 흑인은 백근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탄력에 관여하는 대표적인 근육이 허벅지 앞쪽 대퇴사두근과 뒤쪽 햄스트링인데 흑인은 이들 근육 역시 길고 강하다.

체육과학연구원의 성봉주 책임연구원은 “흑인들은 허벅지는 굵지만 상대적으로 종아리와 발목이 가늘어 점프력이 좋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날렵한 종아리에 잔 근육이 촘촘하게 발달돼 있는 모습은 마치 말이나 사슴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설명이다.

나윤수 송호대 교수(생활체육과)는 허리와 엉덩이의 역할을 강조했다. “점프에 있어선 허리가 기둥이고 엉덩이는 주춧돌 역할을 합니다. 흑인들은 상체와 하체 힘을 모아주는 허리가 선천적으로 튼튼해요. 또 높게 솟은 엉덩이는 무게중심을 위로 끌어올려주면서 탄력을 더해주죠.”

점프력은 단순히 탄력만 좋다고 되는 건 아니다. 프로배구 대한항공의 정종일 트레이너는 유연성과 균형감각 역시 탄력 못지않게 점프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이런 유연성 및 균형감각의 60%는 타고나는 것이다. 정 트레이너는 “흑인들은 머리, 가슴, 허리, 다리, 발에 이르기까지 균형 잡힌 몸매를 타고났다”면서 “부드럽게 점프하고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흑인의 유연성은 동양인이 따라가기 힘든 조건”이라고 말했다.

○ 10kg의 납조끼…1000개의 2단 뛰기


그렇다면 동양인은 마냥 흑인을 부러워만 해야 할까. 낙심하기는 이르다. 점프력도 반복된 훈련으로 향상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흑인 선수들의 놀라운 점프력 이면에도 피나는 노력이 있다. NBA 현역 최고 스타인 르브론 제임스(28)는 2009년 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저의 현재 운동 능력은 TV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는 지옥 훈련의 결과입니다.” 그는 시즌이 끝난 뒤에도 탄력 있고 균형 잡힌 몸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트레이너와 연구하고,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웨이트트레이닝에 할애한다고 덧붙였다.

제러미 린 역시 다르지 않다. 사실 피부색만 동양인일 뿐, 미국에서 자란 그는 미국식 시스템이 길러낸 지독한 훈련벌레로 유명하다. 개인 훈련과 웨이트트레이닝에만 적어도 하루 6시간 이상을 쏟아 붓는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항상 흑인 선수들보다 뒤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들과 수준을 맞추려면 훈련시간을 계속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미국 유학파 농구 선수인 최진수(23·오리온스)는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흑인들도 점프력을 얻기 위해 근육 강화 운동을 엄청나게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미국 고등학생 농구 선수들은 어림잡아 55만 명. 그중 NBA에서 성공할 만한 0.1%에 들기 위해선 스카우트들의 시선을 확 잡아끌 운동 능력이 필수다.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웨이트트레이닝에 사활을 건다.

점프력을 기르기 위해선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 캐나다 동포 출신으로 서전트 점프가 95cm에 이르는 프로농구 모비스의 김효범(29)은 “처음엔 림에 손이 닿지도 않았지만 점프 솔(발목에 차는 무거운 운동보조기구)을 차고 하루 4시간 이상 훈련을 했더니 2년 뒤 덩크슛을 처음으로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프로농구 전자랜드의 유도훈 감독(45)은 현역 시절 10kg의 납조끼를 입고 산에 오르는 훈련을 반복해 서전트 점프를 10cm가량 늘렸다. 뛰어난 탄력으로 ‘캥거루 슈터’란 별명을 얻었던 조성원 삼성 코치(41)는 매일 줄넘기 2단 뛰기를 1000개씩 하며 점프력을 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cm의 키로 경기 중 자유자재로 덩크슛을 구사하는 프로농구 SK의 김선형(24)은 “점프를 높게 하려면 하체 힘도 중요하지만 순간적으로 힘을 모으는 능력이 필수”라고 말했다. “역도 선수들이 주로 하는 스쿼트(역기를 들고 앉았다 일어서는 운동)나 파워클린(역기를 목 근처까지 끌어올렸다 내리는 운동) 같은 운동을 꾸준히 반복해 보세요. 하체 힘은 물론이고 순발력까지 길러져 어느 순간 림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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