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제주 용눈이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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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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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 서니 김영갑 사진의 ‘느림’이 온몸에

용눈이 오름에 올라 바라본 제주 ‘용눈이’란 이름은 오름의 분화구가 용의 눈을 닮았기 때문에 붙었다. 전체적인 오름 능선의 모습이 용이 누워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용눈이 오름은 김영갑 작가의 사진에 아주 잘 나와 있어 직접 그리지는 않았다.
용눈이 오름에 올라 바라본 제주 ‘용눈이’란 이름은 오름의 분화구가 용의 눈을 닮았기 때문에 붙었다. 전체적인 오름 능선의 모습이 용이 누워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용눈이 오름은 김영갑 작가의 사진에 아주 잘 나와 있어 직접 그리지는 않았다.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김영갑)

김영갑이란 사진작가를 알게 된 건 아내가 선물한 사진집 덕분이었다. 그가 루게릭병이란 불치병으로 작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당시, 사진에 푹 빠져 있던 아내는 여러 권의 사진집을 내게 선물했다. 그중 제주의 풍경을 담은 김영갑의 사진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양한 시간과 각도에서 한 장소만을 담아낸 사진들. 제주 오름의 능선이 마치 살아 흐르는 생명체처럼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영갑은 20대 후반 제주에 매료돼 그곳에 눌러 앉았다. 그 후 약 20년 동안 경제적 어려움에도 아랑곳없이,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사진만 찍었다. 때론 동굴에서 생활했고,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샀다. 하지만 너무나 가혹한 운명. 어느 순간 카메라가 무거워졌고 셔터를 누를 때 손이 떨렸다. 병원에서 운동신경세포가 사멸하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고 그의 몸은 점점 굳어만 갔다.

그렇지만 김영갑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동안 촬영한 30만 롤의 슬라이드 필름과 수많은 사진을 전시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짜냈다. 손수 폐교를 꾸며 두모악갤러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2005년, 49세 때였다.

용눈이 오름에 오르다


그는 제주의 여러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지만, 그중에서도 용눈이 오름에 특히 애착이 많았다. 제주도는 한라산의 화산 활동에 의해 생성된 화산섬이다. 화산 활동 와중에 땅 속의 용암이 섬 곳곳의 약한 지반을 뚫고 나와 소규모의 분출을 했는데, 이로 인해 생긴 것이 기생화산인 오름이다. 오름은 제주 방언으로 ‘작은 산’을 뜻한다. 오늘날 제주에는 약 370개의 오름이 산재해 있다. 각각의 오름은 저마다 독특한 느낌을 갖고 있다.

‘20년 동안 오름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 지내지 않았다면 지금도 중산간 오름 모두를 이해하고 사진으로 표현하겠다는 과오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었을 것이다.’

―‘용눈이 오름, 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들’(김영갑)


용눈이 오름을 찾았다. 유명 관광지만 돌고 제주를 떠나는 관광객들의 북적임이 없어 여유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천천히 능선을 따라 정상까지 걸었다.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이 계속해서 주위를 돌아보게 만드는 아름다운 길. 정상에 올라서자 가깝게 보이는 오름들로부터 시작해 멀리 성산일출봉과 바다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왜 이 오름에 그토록 애정을 쏟았던 것일까. 분명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곳이지만, 그 깊이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20년 동안 이곳을 오르내렸던 이의 심정을 20분 동안 정상에 서 있으며 이해하려는 나의 욕심이란…. 그런 욕심을 책망하며 현재에만 집중해 보기로 했다. 대지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 그리고 바람. 끝없이 나부끼는 풀들이 무슨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살짝 김영갑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줌 재가 된 그가 뿌려진 정원


‘육신의 움직임이 둔해질수록 활동 반경이 좁아져 방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손의 움직임이 약해져 책장을 넘기거나 글을 쓸 수도 없다. 혼자 지내는 하루는 느리고, 지루하다. 방 안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다. 눈을 뜨면 천장과 벽만 보인다. 장애를 가진 내 육신이 보인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보인다.’

―‘용눈이 오름, 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들’(김영갑)


숙소로 돌아가기 전 두모악갤러리에 들렀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제주 옛말이다. 고요함이 흐르는 갤러리에서 그의 사진을 돌아보며 좀 전 오름의 잔향을 맡았다. 나는 그림 그리는 작업은 ‘느림’이란 단어로, 사진 찍는 작업은 ‘순간’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가 하나의 피사체만을 담기 위해 가졌던 기다림은 사진에도 ‘느림’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줬다. 사진에서의 느림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 번 놓치고 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순간들도 있기 때문이다. 항상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그건 사진의 가장 큰 매력이자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오름의 사진들은 정적이었지만 그의 기다림을 생각하면 마음이 시렸다. 역시 나는 그림쟁이로 남아야 할 것 같다. 사진을 본 후 갤러리 정원을 거닐었다. 바람 한 점 없다. 오름을 지나던 그 많은 바람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가만히 텅 빈 정원을 향해 카메라를 든다. 무거운 기다림은 없다. 셔터를 누른다. 자, 여기를 보세요. 찰칵. 한 줌 재가 된 그가 뿌려진 정원. 옛날 운동장이었을 때 뛰놀던 아이들의 웃음을 한가득 머금은 정원은 행복한 햇살 아래 정지해 있었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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