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꽃과의 대화]늘푸른 꽃나무

  • Array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남녘의 동백, 겨울햇살에 속살마저 보여주네

초겨울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애기동백. 동백나무와 달리 잎이 작고 꽃이 활짝 피며 꽃이 질 때는 꽃잎이 하나씩 떨어진다. 동백꽃은 꽃송이 전체가 한꺼번에 떨어진다.
초겨울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애기동백. 동백나무와 달리 잎이 작고 꽃이 활짝 피며 꽃이 질 때는 꽃잎이 하나씩 떨어진다. 동백꽃은 꽃송이 전체가 한꺼번에 떨어진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밤차를 타고 전남 순천의 선배를 만나러 갔다. 원예를 전공하며 식물에 대한 관심이 무럭무럭 자라던 그때, 그 아침 선배네 집안 뜰에 있는 나무를 보았을 때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월의 추위 한가운데서 나무의 푸른빛을 볼 수 있다니. 그때까지 나의 경험 속에서는 전혀 없던 것이었다. 서울에는 기껏해야 겨울의 쓸쓸함을 더해주는 소나무의 빛바랜 푸르름만 있었던 터였다.

선배의 집 마당에는 동백과 소철을 비롯해 이름도 모르는 다양한 나무들이 ‘토실토실’ 자라고 있었다. 골똘히 정원의 나무를 보고 있는 나를 선배가 신기하게 쳐다보며 방에 들어갈 것을 재촉했다. 나는 겨울철 나무의 푸르름에 무심한 그의 태도가 더 신기했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중부지방의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동백나무는 어디에서 길러야 할까?”라고 질문을 하곤 한다. 많은 학생이 “당연히 화분에서 길러야 한다”고 답한다. 일부만 고개를 갸우뚱한다. 고향을 물어보면 어김없이 부산이나 여수, 광주 출신들이다. 사람은 경험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인지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그렇다. 서울 등 중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동백나무나 유자나무, 무늬식나무 같은 것들은 화분에서만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산이나 여수, 목포, 제주 같이 따뜻한 남쪽지방에서는 동백나무를 흔히 도로변이나 정원에 그냥 심는다.

우리나라는 작은 국토면적에 비해 다양한 식생분포가 나타나는 편이다. 보통 대전을 경계로 그 이남에는 대나무와 동백 같은 상록활엽수가 자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순천이나 진주의 추위도 만만치는 않다. 미국 농무부의 내한성(추위를 견디는 정도) 기준에 따르면, 순천과 진주도 서울 수원과 같은 권역(USDA Hardness Zone 7b)으로 구분된다. 연중 가장 추운 날 최저온도의 20년간 평균이 서울은 영하 13.5도, 순천과 진주는 영하 12.5도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불과 1도밖에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순천과 진주에서 한겨울에도 푸른 식물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연중 가장 추운 날의 최고온도 분포에 있다. 우리나라 중부와 남부는 하루 중 최고온도가 영하 3도 이하인 날 수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런 날이 중부지방에선 1년에 6∼10일이지만 순천과 진주에선 0.1∼0.4일에 지나지 않는다. 순천과 진주에선 최고온도가 영하 3도 이하인 날이 2∼10년에 한 번씩만 있다는 뜻이다. 덕분에 늘푸른 나무들이 얼어 죽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남부지방의 정원에는 늘푸른 나무가 많다. 꽃보기나무로는 동백나무, 애기동백, 서향, 금목서, 협죽도(유도화), 꽃치자, 돈나무 등이 있고, 잎보기나무에는 무늬식나무, 꽝꽝나무, 광나무, 당종려, 태산목, 후박나무, 남천 등이 있다. 도토리 열매가 달리는 참나무류도 오죽하면 좀가시나무와 참가시나무 등 늘푸른 가시나무 종류가 주종을 이룬다.

조금만 있으면 여수며 부산, 목포에선 그 지방의 ‘적절한’ 추위 속에서 애기동백이 활짝 피기 시작하리라. 중부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여간 부럽지가 않다. 어쩔 수 없이 화분에서 답답하게 자라고 있는 동백의 꽃망울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 남쪽 지방에선 가을부터 금목서, 은목서, 구골나무 꽃이 피고 12월에는 애기동백, 2월부터는 동백나무, 3월이 되면 서향이 정원에서 꽃의 향연을 펼친다. 원예를 전공하는 나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서정남 농학박사(농림수산식품부 국립종자원) suhjn@seed.g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