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장롱에 ‘엽기’가 주렁주렁 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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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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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장롱롱메롱문 열었을 때,’ ★★★☆

내면의 비밀을 간직한 은밀한 죄악의 공간으로 장롱을 형상화한 ‘내가 장롱롱메롱문 열었을 때,’. 프로덕션 왜 제공
내면의 비밀을 간직한 은밀한 죄악의 공간으로 장롱을 형상화한 ‘내가 장롱롱메롱문 열었을 때,’. 프로덕션 왜 제공
극작가 동이향과 고연옥은 닮았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할 사건사고에서 극작의 모티브를 얻는다는 점에서. 다만 고연옥 씨가 연쇄살인사건 같은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서 영감을 얻는다면 동이향 씨는 단신으로 보도될 만한 작은 사건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가 쓰고 연출한 실험극 ‘내가 장롱롱메롱문 열었을 때,’는 국제면과 사회면을 장식한 여러 건의 뉴스를 토대로 했다. 프랑스 통신회사 직원 25명의 연쇄자살 기사와 아비를 살해한 뒤 안방 옷걸이 뒤에 4개월간 유기했던 대학생에 대한 기사, 복제인간 3명을 출산시켰다고 주장한 이탈리아 산부인과 전문의 안티노리 박사의 인터뷰 기사….

얼핏 연관성 없어 보이는 사건들은 인간 개개인의 고유함이 말살돼가는 현대사회의 병적인 징후로 엮인다. 직장 동료들의 연쇄자살로 뒤숭숭한 회사를 다니는 아비는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변변한 직장 없이 그 아비에게 얹혀 사는 아들은 짜증나는 아비를 살해해 장롱 속에 숨겨둔 환상/현실에 시달린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에 지쳐 포르노영화에 빠져든 이웃집 여인은 자신의 장롱 속 포르노테이프와 아들의 장롱 속 포르노테이프를 맞바꾸자고 제안한다.

차츰 직장에서 밀려나는 아비는 좀비에 가까운 삶을 사는 서울역 노숙인을 보고 동질감을 느끼고, 죽은 아비의 손톱을 쥐에게 먹여 복제된 아비는 멀쩡하게 출근해서 노숙인이 된다. 하지만 주변에선 실제 아비와 복제된 아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막간극 형식으로 유전자복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안티노리의 인터뷰가 삽입된다. 이때 7명의 배우는 안티노리와 기자의 역할을 번갈아 맡는다. 인간복제가 일상화되는 시대에 그들의 차별성이 무의미함을 풍자하는 극적 장치다.

제목의 장롱롱메롱문은 장롱문이란 텍스트를 복제해 여기저기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한 환유다. 장롱은 이중삼중의 의미를 지닌다. 내면의 고유함이 감춰진 생성의 공간이자 모두의 개별성을 무화시키는 사멸의 공간이다. 아쉬운 것은 개성의 사멸에 대한 인간주의적 거부감이 너무 큰 탓에 생성과 사멸을 등치시키는 자연주의적 순환의 통찰이 부족한 점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4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 2만 원. 070-4025-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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