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슈]서울역사 밖 초짜 노숙인의 겨울나기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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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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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 한파 넘어 재활의 길 제대로 걷고 싶건만…

《겨울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겨울’이란 말만 들어도 뼛속까지 시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노숙인들입니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는 한 50대 여성 노숙인은 “11월만 되면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고 합니다. 길거리 생활 6년째에 접어든 한 40대 ‘베테랑 노숙인’은 “한겨울에 길바닥에서 자봤어? 피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지”라고 했습니다. 서울역은 무료 급식이 많고 일용직 일자리 구하기도 쉬워 노숙인들의 ‘메카’로 통합니다. 그런데 올해 7월 서울역을 관리하는 한국도시철도공사(코레일)가 야간 노숙행위 전면 금지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노숙인들의 구걸과 소음으로 시민들의 민원이 이어진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이 조치의 효과에 대해선 현재 서울역 측과 노숙인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서울역은 “인근 노숙인 수가 3분의 2 이상 줄었다. 갈 곳 없는 노숙인들을 위한 각종 지원 대책 역시 시행 중”이라는 방침입니다. 반면 노숙인들은 “대책 없는 조치로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는 주장입니다. 지난해 겨울에 객사한 노숙인이 서울에서만 300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2’는 8일 서울역에서 노숙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초짜 노숙인’ 박모 씨(42)를 만났습니다. 종일 그와 함께하면서 혹독한 겨울나기를 준비 중인 그의 하루를 그려 봤습니다.》

식탁에 앉아 기도를 드린다. 30초도 되지 않는 아내의 기도 시간. 일곱 살짜리 아들에겐 그 시간이 3시간처럼 느껴지는가 보다.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반찬을 덥석 집는다.

“기도하는 동안엔 먹지 말랬지”란 아내의 핀잔에 고개를 푹 숙인 아이. 하지만 눈으론 여전히 반찬을 훑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매를 번다”면서 아이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는다. 그러면서도 입가엔 넉넉한 미소를 짓는다. 겨울에도 온기가 흐르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따뜻한 밥 한 숟가락 뜨는 이런 게 바로 행복 아닐까.

먹어라. 살고 싶다면

그러다 몸에 스며드는 한기에 잠을 깬다. 아직 잠에서 깰 때마다 낯설다. 오히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인 것 같다.

겨울이 오고 기온이 떨어지면 행인들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하지만 노숙인들은 갈 곳이 없다. 그냥 행인들이 오가는 그곳에 누워 잠을 청한다. 8일 오후 서울역에서 한 노숙인이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겨울이 오고 기온이 떨어지면 행인들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하지만 노숙인들은 갈 곳이 없다. 그냥 행인들이 오가는 그곳에 누워 잠을 청한다. 8일 오후 서울역에서 한 노숙인이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기상 시간이다. 하지만 이렇게 늦잠을 자도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쑤신다. 행인들은 서울역 지하도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나만의 공간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러다 행여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고개를 푹 숙인다.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빨리 걷기도 한다. 여기 온 처음 몇 달 동안은 나도 그들의 눈을 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당당해진’ 내 모습을 발견했다. 반복된 일상에 적응이 된 걸까, 아니면 그냥 체념했기 때문일까. 놀랍고 한편으론 두렵다. 여기서 알게 된 목사님이 얼마 전 해준 말씀이 떠오른다.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술과 친해지고, 이 바닥에 오래 눌러앉게 됩니다. 힘들어도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벗어날 궁리를 해야죠.”

낮 12시 반. 한 종교단체에서 나눠 주는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선다. 이미 식사를 마친 사람도 수두룩하다. 음식을 받고선 5분도 되지 않아 식판을 비운다. 일단 어지러울 만큼 배가 고프고, 날씨가 쌀쌀해 음식이 금세 식기 때문에 빨리 먹어야 한다.

옆에는 나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한 여자가 부지런히 밥을 먹고 있다. 국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국에 밥을 잔뜩 넣어 먹는다. 내 시선을 알아챘을까. 그녀가 말한다. “먹을 수 있을 때 잔뜩 먹어 둬. 겨울에 버티려면 지금 먹어둬야 해. 커피도 많이 마시고.”

옆에서 지켜보던 한 남성이 히죽히죽 웃으며 한마디 덧붙인다. “겨울은 무슨,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마지막 식사가 될지 모르니 먹어두는 거지.”

꿈이 그냥 꿈만이 아니길


지난해 이맘때는 악몽이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빚 독촉에 시달리다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일단 아내와 아이는 아는 사람에게 맡겼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아니, 갈 곳이 있다 해도 갈 염치가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혼자 길바닥에 나왔다. 술이나 마시다 그냥 길에서 죽는 게 낫겠다며 체념했다.

하지만 12월 동장군(冬將軍)은 그런 마음까지 사라지게 할 만큼 혹독했다. 결국 따뜻한 서울역으로 흘러왔다. 수백 명의 노숙인이 있었다. 텃세도 심했다. 자리를 잡고 누우면 “못 보던 얼굴이 여기서 비벼댄다”며 시비를 걸기 일쑤였다. 그 사이엔 따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내 아픈 얘기를 들어주며 상처를 달래줬다. 노숙 생활 노하우도 친절하게 전수해 줬다. 그렇게 알게 된 겨울철 잠자리 준비 요령은 생존과 직결됐다. 찬바람을 피할 잠자리는 어디가 적당한지, 종이 박스, 스티로폼 단열재, 등산용 깔개 등을 어떻게 배치해 잠자리를 만드는지 등을 배워 겨우 추위를 피했다.

이제 오후 6시 전에도 날씨가 꽤 쌀쌀하다. 이미 많은 노숙인이 월동 준비를 시작했다. 내의를 여러 벌 확보하고, 두꺼운 외투와 솜이불, 귀마개를 구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다. 서울역이 오전 1시 반 이후 역내 야간 노숙행위를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역사 주차장이나 지하도 등 밖에서 지내도 견딜 만하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안다. 12월이 되면 그렇게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아무리 두껍게 껴입고, 이불을 덮고, 침낭으로 감싸도 냉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추위에 떨다 보면 ‘이러다 잠깐 잠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이 머리에 맴돈다.

밤늦은 시간 서울역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안전사각지대가 된다. 화장실까지 장악해 기거하는 노숙인 때문에 일부 시민이 피해를 본다. 술 먹고 시비를 거는 노숙인도 있다. 하지만 특별한 대책 없이 쫓아낸다는 사실엔 분통이 터진다. 나처럼 신용불량자거나 전과가 있는 사람, 몸이 아픈 사람들은 일감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막노동 일감도 겨울엔 크게 준다. 노숙인에게 제공되는 쉼터나 보호센터는 조건이 까다로울뿐더러 그나마 턱없이 부족하다.

이곳에 있다 보니 노숙인도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한 부류는 쉼터 등 다른 곳에 갈 수 있지만 간섭받기 싫고 편하게 지내고 싶어 그냥 머무르는 이들. 다른 부류는 재활 의지가 있고 길거리를 벗어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들이다. 재활대책이 없다면 후자에 속하는 이들도 결국 다른 곳에서 떠돌다 죽으라는 얘기밖에 더 되는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오늘도 서울역 지하도에 눕는다. 이곳 사람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나도 영등포나 다른 곳으로 옮겨 볼까.’ 이내 그 마음을 접는다. 그곳에 가면 또 이방인 취급을 당하지는 않을까 무섭다. 무엇보다 그나마 있던 재활의지마저 꺾여 장기 노숙인이 될까 두렵다.

오늘따라 아내가 지어준 따뜻한 밥 한 공기가 그립다. 아들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도 보고 싶다. ‘내가 꾸는 꿈이 그냥 꿈만이 아니었으면….’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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