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소리’가 ‘글자’되는 지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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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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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할 때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모양 본떠 ㄱ 만들어…
이처럼 한글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의 형태가 깃들어 있어

《“훈민정음 창제에 따라 한국의 수많은 고유어가 앎(知)의 영역으로 들어왔어요. ‘멍멍’ ‘뒤죽박죽’ 등 의성·의태어도 ‘앎’이 되어 이어졌죠. 이후 한국의 지식세계는 더욱 넓고 깊어졌습니다.” 일본의 한국어 연구자인 노마 히데키 국제교양대 객원교수(58·사진)가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과 원리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한 책 ‘한글의 탄생’(돌베개) 한국어판을 내놓았다.》
■ 한국어 학자 日노마 히데키 국제교양대 객원교수
‘한글의 탄생’ 한국어판 펴내

현대일본미술전에서 입상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미술가였던 그는 우연히 한글을 접하고는 조형적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1983년 서른 나이에 도쿄외국어대 조선어학과에 입학한 후 30년 가까이 한글을 연구했다. 그는 5일 전화인터뷰에서 유창한 한국어로 “한글의 구조를 보면 ‘소리가 문자가 되는’ 놀라운 시스템을 발견할 수 있다. 한글 탄생은 엄청난 지적 혁명이자 세계 문자사의 기적”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언어들은 소리와 문자가 자의적으로 연결되지만, 한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의 형태가 깃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ㄱ을 발음할 때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게 되는데, 그 모양을 본떠 ㄱ을 만드는 방식이니까요. 보이는 것을 보이는 형태로 그려낸 한자(상형문자)와도 다릅니다. 1400년대에 현대 언어학으로도 간신히 분석해낼 수 있는 수준의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노마 교수는 한글이 용음합자(用音合字·소리를 기준으로 글자를 합침)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런데 음을 나타내는 자모(字母)를 합쳐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한자(漢字) 기반의 체계를 음절, 음소, 형태소 등으로 분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山(산)은 ㅅ/ㅏ/ㄴ으로 해체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에게 하나의 완전무결한 문자인 한자를 해체하는 건 지식의 붕괴를 의미했다. 따라서 노마 교수는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것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나 정치적 술수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세종대왕을 위시한 집현전파와 최만리파의 투쟁이 격심했습니다. 최만리는 ‘소리를 이용해 문자를 만든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비판한 반면 집현전의 정인지는 ‘천지자연에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따르는 글이 있다’고 주장했죠. 이건 정치투쟁이 아닌 지적(知的)투쟁이었습니다.”

노마 교수는 “문자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문자를 활용한 텍스트(용비어천가)를 만들어낸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라며 “이후 한글은 각종 언해문, 시조, 가사, 판소리, 소설 등으로 이어지면서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후 3만 부 이상 팔린 이 책은 한글 연구에만 그치지 않고 저자의 모국어인 일본어를 비롯해 한자 및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들과 한글을 비교 분석한다. 국립국어원 권재일 원장은 “민족주의적 맥락이 아닌 보편적인 관점에서 한글의 구조와 우수성을 잘 통찰했다”고 평가했다. 노마 교수는 이 책으로 2010년 11월 마이니치신문사가 주최하는 제22회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해 7일 오후 7시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한글의 탄생’에 대해 강의한다. 2012년 봄 완성을 목표로 현재 3000쪽 분량의 한국어 교육론을 집필하고 있다.

“보편적 객관적으로 한글은 뛰어난 문자입니다. 그 자체로 한국인뿐 아니라 전 인류가 자랑스러워하고 발전시켜야 할 자산이지요.”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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