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그가 사약을 받은 후 조선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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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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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이덕일 지음/416쪽·1만7000원·다산초당

윤휴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 한국 고대사, 병법에도 통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해오는 저서는 1927년 출간된 문집 백호집 정도다. 이덕일 씨는 “윤휴 후대에 학문, 북벌, 민생 등 세 가지 키워드로 그의 삶을 정리한 책 ‘수옥문답’이 있지만 저자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사후 윤휴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던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다산초당 제공
윤휴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 한국 고대사, 병법에도 통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해오는 저서는 1927년 출간된 문집 백호집 정도다. 이덕일 씨는 “윤휴 후대에 학문, 북벌, 민생 등 세 가지 키워드로 그의 삶을 정리한 책 ‘수옥문답’이 있지만 저자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사후 윤휴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던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다산초당 제공
1680년 5월 20일. 서대문 밖 여염집에서 장독(곤장을 맞아 생긴 상처의 독)에 신음하던 윤휴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마지막 말을 남기기 위해 먹과 붓을 요청했지만, 이마저 거부당했다. 그는 역모에 가담했을까. 하지만 죄목 어디에도 ‘역(逆)’이란 말은 없었다. 윤휴는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뭔가”라고 말하고는 사약을 들이켰다.

조선 숙종 때 남인 정치가이자 유학자인 윤휴(尹휴·1617∼1680). 다소 낯선 이름이다. 역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저자가 그의 삶에 주목했다. 왜 윤휴일까.

윤휴는 초야에 묻혀 학문만 연구하다가 58세 때 출사를 결심했다. 북벌의 호기가 왔기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벼슬 없던 선비 시절에도 그는 널리 학식과 덕망을 인정받았다. 특히 ‘주자학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맞서 “주자학과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에 들어간 뒤 윤휴는 일관되게, 구체적으로 북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북벌에 뜻이 없었던 숙종과 북벌이라는 명분만 필요했던 우암 송시열(1607∼1689) 등 서인과 번번이 대립해야 했다.

지패법, 호포법 등 당시 신분제를 뒤흔드는 개혁안도 만들었다. 하지만 서인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인 양반의 반발은 무척 거셌다. 결국 그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처형됐다. 유서조차 남기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었고, 그의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0여 년 전 한 시사월간지의 역사인물 특집을 자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윤휴를 조명했다. 그런데 기자로부터 ‘여주에 사는 후손이 아직도 윤휴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죽은 지 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윤휴는 여전히 민감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 교조화된 주자학과 이를 숭배한 서인, 특히 노론에 기인한다고 주장해왔다.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경종을 독살하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등 정치 공작을 자행해온 이들이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되고 광복 이후에도 주류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 책 역시 윤휴가 사형당한 후 더는 그들과 ‘다른’ 생각이 허용되지 않았고, 조선은 침묵의 제국이 됐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지금 이 시점에서 윤휴를 조명한 이유이자 지금도 윤휴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 책은 윤휴의 삶과 사상은 물론, 당시 최고 학자들과의 교류담과 치열했던 정쟁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담았다. 특히 병법에도 능했던 윤휴가 당시 청나라 사정을 제대로 파악한 후 승리가 가능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북벌론에 대해 ‘이미 강대국이 된 청나라에 맞서고자 한 세상물정 모르는 조선의 치기’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만약 윤휴의 뜻이 관철돼 조선왕조가 북벌을 실행했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아쉬운 건 어디선가 읽은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저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와도 제법 겹치고,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 왕 독살사건’ 등에 거론된 부분이 여전히 반복된다. 물론 저자가 노론 세력의 패착에 대해 사활을 걸고 논쟁해 온 만큼 관련 저서가 많을 수밖에 없지만, 자칫 ‘그의 책은 다 비슷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염려도 든다.

올해 초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도세자의 고백’이 사료를 왜곡하고 과장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19일 있었던 책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정 교수는 ‘한중록이 100%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주장하지만, 나는 한중록을 사도세자 사건을 다루는 사료 중 하나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이 책 역시 정 교수의 비판처럼 저자가 원하는 사료만 인용하고 특정 부분을 과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우리도 이 책을 그 시대를 바라보는 다양한 저술 중 하나로만 보면 된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이다.

어쨌든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 북벌이라는 명분만 따르고 실제로 추진할 의지가 없었다는 것은 여러 저술을 통해 밝혀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국사 교과서에선 북벌의 자리에 윤휴가 아닌 송시열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지금의 우리 시대가 윤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시절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윤휴는 어쩌면 지하에서 그렇게 묻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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