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인 공간에 ‘고요함’ 담아내려 함께 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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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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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구겐하임미술관 단독 회고전 이우환 화백 -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 씨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우환: 무한의 제시’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작가 이우환 씨(왼쪽)와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 씨.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우환: 무한의 제시’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작가 이우환 씨(왼쪽)와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 씨.
작가 이우환 씨의 40여 년에 걸친 작업을 선보인 구겐하임 전시장. 숱한 시행착오 끝에 비탈진 경사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뻥 뚫린 공간, 둥근 곡면의 벽면 등 구겐하임의 특이한 공간이 미니멀한 작품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전시가 탄생했다. 뉴욕=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작가 이우환 씨의 40여 년에 걸친 작업을 선보인 구겐하임 전시장. 숱한 시행착오 끝에 비탈진 경사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뻥 뚫린 공간, 둥근 곡면의 벽면 등 구겐하임의 특이한 공간이 미니멀한 작품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전시가 탄생했다. 뉴욕=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이우환 화백에게 2011년 6월 24일은 뜻 깊은 날로 기억될 것 같다. 작가가 일흔다섯 번째 맞는 생일이자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을 통째로 차지하고 석 달간 펼쳐지는 ‘이우환: 무한의 제시’전의 첫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그는 구겐하임의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을 앞에 두고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회고전을 기획한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 씨의 진행으로 열린 행사에서 그는 때론 차분하게, 때론 열정적으로 자신의 미학을 설명해 여러 차례 박수를 받았다.

전시에 대한 호평도 즐거움을 더했다. 뉴욕타임스는 “올여름 구겐하임은 피곤하고 기진맥진한 대중에게 고요함의 오아시스를 선사한다”는 내용의 리뷰를 23일자에 실었다. 기사는 마지막 전시장의 세 벽면에 붓 자국만 하나씩 남긴 작품을 언급하며 “리얼리티와 형이상학의 훌륭한 결합”이라고 평하고 “텔레비전 혹은 비행기 창문처럼 보이는 붓자국이 미술관 벽을 넘어 무한으로 펼쳐지는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고 소개했다. 한국 미술에 큰 힘을 실어준 전시란 점에서 뉴욕의 작가들도 한마음으로 기뻐하고 있다. 중견작가 변종곤 씨는 “구겐하임 전관, 그것도 3개월 동안 한국 작가의 회고전이 열린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라고 말했다.

성공적 전시를 연출한 작가와 큐레이터는 준비 기간 내내 “공간과 싸워야 했다”고 입을 모았다. 화이트 큐브라고 불리는 사각형 전시공간과 달리 나선형 경사로에 위아래가 트인 구겐하임. 그 속에 단순함과 고요함이 핵심인 작업을 담아내는 것이 힘들었다는 설명이다. 이 씨는 “그래서 처음엔 부속 갤러리만 쓰겠다고 주장했으나 리처드 암스트롱 관장이 부임하면서 전관 전시를 제안해 결국 수락했다”고 말했다.

“까다로운 과제였지만 나의 옛 작품이 새롭게 태어난 전시가 됐다. 젊은 관객들이 다가와 처음 보는 작품인데도 대화가 되고 큰 인상을 받았다고 얘기해줘 기뻤다.”(이 씨) “구겐하임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법을 발휘한다. 우리의 고민은 마침내 해피엔딩이 됐다.”(먼로 씨)

이 씨의 작품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만남과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 속에는 일본과 유럽을 옮겨 다니며 살면서 낯선 환경과의 만남에서 긴장과 불안을 떨치기 힘들었던 체험이 스며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정이 생겨 일본에 갔다. 일본 말도 모르고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미술 하면서 이름이 좀 알려지니 나에 대한 저항감이 생겨났고 유럽으로 가게 됐다. 그곳에서도 무명에서 벗어나면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환경에서 만남이란 단어를 늘 생각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늘 ‘타자’였고 나와 같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만남’은 곧 ‘관계’라는 절실한 문제로 다가왔고 이는 시각과 개념이 만나는 회화와 설치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런 작업에서 심오한 사유를 읽어낸 큐레이터 먼로 씨. 1980년대 일본에 살면서 이 씨가 한국의 단색화파, 일본의 전후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중요한 작가란 사실을 알게 됐다. 25년간 작업을 지켜본 끝에 이 전시를 제안했다. 그는 “근년에 미니멀리즘과 후기 미니멀리즘에 대한 연구가 늘고 있다. 1960, 70년대 아시아에서도 주요한 작품이 제작됐는데 그 흐름에 이우환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먼로 씨는 “이우환은 초국가적 작가”라며 “이번 전시는 세계적 인물이자 현대미술의 거장이란 두 측면에서 작가를 재조명하고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자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공간과 더불어 이 씨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시간이다.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시리즈는 사라지는 시간을 오롯이 보여준다. 작가는 “붓에 물감을 한 번 묻혀 캔버스에 찍어 나가면 차츰 물감이 희미해진다”며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있던 것이 사라지고, 사라졌던 것이 다시 나타나는 순환과 무한을 드러낸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동시대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작가의 생각은 확고하다. “예술은 과학과 종교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뭘 믿어도 늘 분명하지 않고 회의가 떠나지 않는다. 예술의 메시지는 자기 반성, 자기 부정을 통해 사람들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과 계기를 주는 것이다.”

고독한 삶에서 깊은 성찰을 길어 올리고, 까다로운 공간에서 더 웅숭깊은 울림의 전시를 만든 작가. 이제 다시 새로운 도전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뉴욕=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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