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배우 최불암 ‘강남 1980 vs 2011’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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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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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전 강남 모습 영화에 생생… “지금? 화려하지만 ‘그늘’이 보여…”

“빌딩이 높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진다.” ‘수사반장’의 마지막 회에서 최불암 씨가 남긴 명대사이다. 실제로 그에게도 강남은 ‘비정한 도시’를 처음 접한 곳으로 기억된다.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서 강남의 어제와 오늘을 설명하는 최 씨.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빌딩이 높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진다.” ‘수사반장’의 마지막 회에서 최불암 씨가 남긴 명대사이다. 실제로 그에게도 강남은 ‘비정한 도시’를 처음 접한 곳으로 기억된다.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서 강남의 어제와 오늘을 설명하는 최 씨.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967년쯤이었을 거야. 그때 배를 타고 건너와 처음 강남땅을 밟아봤지.”

지금 한강에는 31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하지만 배우 최불암 씨(71)의 기억 속 강남은 “서울을 떠나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는 드라마 ‘아씨’(1970년 3월∼1971년 1월)로 유명한 고성원 PD가 당시 연출했던 사극에 출연하기 위해 뚝섬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제목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포도대장 역할이었어. 봉은사 근처에서 촬영을 했지. 그 근처 자연경관이 좋잖아. 지금은 번듯한 건물들이 잔뜩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어. 막 개발 조짐이 보이면서 드문드문 돌 깨는 소리가 들리고 그랬어. 그때는 강남이라는 곳을 잘 알지도 못했지.”

그는 당시 색동저고리 같은 포도대장 옷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 말을 타고 달려가며 호령하는 장면을 촬영하다 말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함께 출연했던 여배우들이 그런 그를 보고 웃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 추억은 ‘즐거웠던 시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할 건 아니지만, 내 마누라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어.”

예의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귀띔해 줬다. 그의 아내 김민자 씨(69)는 당시 한창 잘나가는 배우였다. 최불암은 신인에 불과했다.

○ 강남과 수사반장

그에게 ‘강남’은 1971년부터 18년 동안 출연했던 MBC 드라마 ‘수사반장’ 속 사건으로도 기억된다.

“1972년 겨울이었을 거야. 드라마 속 내 역할의 실제 모델인 최중락 전 총경(현 삼성에스원 고문)이 오전 4시쯤 갑자기 전화로 나를 불러냈어. 아이 하나가 아파트 밑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됐다고.”

수사반장은 실화를 재구성해 드라마로 엮어냈다. 당시 최 형사는 드라마를 시작하고 나서 한동안 최불암 씨에게 실제 사건 현장을 보여주며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줬다고 한다.

“현장에 가서 보니 누군가 아이 시신에 하얀 비닐을 덮어놨더라고. 그런데 그 모습을 딱 보는 순간 아이가 얼음 속에 얼어 있는 것 같은 거야. 누가 담요 한 장이라도 덮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 모습을 본 최 형사가 쭉 늘어선 구경꾼들에게 “담요 하나 덮어줄 사람 없었냐”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모두들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덮어놨던 비닐을 젖혀보니 아이가 흘린 콧물이 얼어붙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정’이 있었어. 어떤 아이가 울고 있으면 내다보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먹을 것을 주며 달래주곤 했었거든. 그런데 그 누구 하나 아이가 우는데도 내다보지를 않은 거야. 그때 ‘비정한 도시’를 처음으로 접한 거지. 개발과 함께 사람들도 조금씩 각박해지기 시작했던 거야. 그래서 영동(강남의 옛 이름) 하면 그 사건이 먼저 떠올라. 그게 영동의 이미지로 딱 박혀버린 거야.”  
▼ “1967년 쯤이던가… 촬영중에 돌깨는 소리 들리더라고” ▼

○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최불암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최 씨가 연기하는 모습.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최 씨가 연기하는 모습.
1980년 개봉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감독)에서 최 씨는 ‘김 회장’으로 출연했다. ‘전원일기’의 ‘김 회장’과 이름은 같지만 역할은 180도 달랐다. 영화 속 김 회장은 강남에서 땅 투기와 사채업으로 돈을 번 인물. 실제로 강남 개발 과정에서 자주 나타났던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이 감독과의 의리 때문에 출연한 거야. 이 감독은 내가 그런 악한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거라고 했어. ‘바람 불어…’을 마지막으로 한 20년 정도 영화를 안 찍었지. 하도 오래돼서 역할 자체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안 나.”

영화 속에는 김 회장이 면도사 ‘미스 유’(김보연)를 유혹하면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기획자 고형욱 씨에 따르면, 그 장면은 강남역 동아극장 근처의 대형 갈빗집에서 찍었다. 김 회장과 미스 유가 함께 들어간 모텔도 그 근처였다.

“하도 많이 바뀌어서 어디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어. 더군다나 길거리에서 촬영하는 장면이 거의 없고, 대부분 안에 들어가서 찍었으니까.”

이 영화는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 강남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영화에는 강동구 천호동과 길동 일대도 많이 등장한다.

고 씨는 “‘바람 불어…’을 찍을 때는 천호동을 넘어 막 길동 쪽으로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였다고 한다. 주택가와 나대지가 동시에 보이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잠시 사용하다가 헐어버린 가건물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 후로 강남에는 자주 안 왔어. 가끔 행사가 있으면 들렀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어. 오늘 와서 보니까 강남역 대로변을 따라 TV들이 달려 있구먼. 뉴욕제과는 예전에도 본 기억이 나네.”(웃음)

그는 1979년부터 지금까지 서울 여의도에 살고 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사를 하기도 했지만, 여의도를 떠나지 않았다.

“여의도가 방송국도 가깝고 편해. 강남은 너무 번잡해.”

○ 장사 잘 안된 강남 최초 문화공간

1985년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안에 현대예술극장이 생겼다. 최불암 씨와 강남을 이어주는 또 다른 연결고리다. 정장현 현대백화점 사장이 먼저 “지역사회에 기여한다는 차원에서 극단을 운영해 보라”고 제안했다. 최 씨는 2년 정도 극장 운영을 맡았다.

“지금 강남에는 영화관, 공연장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옛날에는 강남에서 영화나 연극을 볼 수가 없었어. 극장이 하나도 없었어. 영화관과 공연장은 전부 강북에 있었지. 아마 현대예술극장이 강남에 처음 생긴 문화공간일 거야. 그런데 생각보다 운영이 잘 안되더라고.”

그는 강남의 탄생과 성장의 명암을 모두 지켜봤다.

강남의 과거와 현재
강남의 과거와 현재
“대한민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곳이지. 하지만 화려함 뒤에는 그림자도 있었어. 영화나 ‘전원일기’에도 나오지만, 그때는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 사람들은 ‘바람 불어…’의 주인공들처럼 자장면 배달을 하거나 구두를 닦았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할 수가 있었거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도 나왔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 지금의 발전도 있는 거지.”

그도 강남에서 돈을 벌었을까. 최 씨는 손사래를 쳤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부자가 엄청 나왔지. 하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 난 전혀 몰랐어. 바빴거든.”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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