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자수의 魂은 숨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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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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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원 손인숙 씨의 자수와 삶

40여 년간 묵묵하게 자수에 열정을 쏟아온 예술가 손인숙 씨가 서울 강남구 개포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수를 놓고 있다. 벽에 걸린 작품은 손 씨가 자주 걷는 서울 대모산 숲길을 자수로 표현한 것. 그가 수를 놓고 있는 작품은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섭리’ 시리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40여 년간 묵묵하게 자수에 열정을 쏟아온 예술가 손인숙 씨가 서울 강남구 개포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수를 놓고 있다. 벽에 걸린 작품은 손 씨가 자주 걷는 서울 대모산 숲길을 자수로 표현한 것. 그가 수를 놓고 있는 작품은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섭리’ 시리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지난해 12월 초대를 받아 간 그곳은 별천지였다.

예원 손인숙 씨(61)가 안주인인 서울 강남구 개포동 195m²(59평)짜리 아파트는 사실상 박물관이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신윤복의 미인도, 경북 청도의 운문사 비로전, 서울 대모산 숲길 등 옛것과 지금 것이 ‘자수’로 거듭나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불화, 흉배, 보자기, 장신구, 목가구 등 손 씨가 자수를 놓은 분야는 21가지나 됐다.

‘섭리’란 제목의 그의 자수 작품 앞에선 할 말을 잊었다. 명주실의 보풀거리는 질감과 역동적인 움직임은 자연이 ‘학학’대는 숨결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밑그림을 그려 수를 놓았습니까”라고 묻자 손 씨는 “아니요. 젊은 시절엔 그렇게 했는데 이젠 바늘이 절로, 그리고, 실이 절로 채색합니다”라고 답했다. ‘자수 달인’의 경지였다.

그의 이어진 말. “인간의 만남과 사랑, 끝없는 삶의 대화, 인간과 신의 섭리를 환상적 기법으로 표현한 겁니다.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든 거죠. 저는 사진을 사진으로만 보지 않고, 흉배(조선시대 왕과 왕세자, 문무백관이 입는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한 표장)를 흉배로만 보지 않아요. 단순 기능인이 못하는 예술세계를 상상력으로 이루고자 합니다.”

이화여대 자수과(현 섬유예술과)를 나와 지금껏 5000여 점의 자수 작품을 완성했다는 그는 존재의 근원적 의미를 파고들고 있는 듯했다. 반짝이는 흉배 자수 작품은 ‘한국의 스와로브스키’ 같았다.

손인숙 씨의 작품인 ‘조가비 열쇠꾸러미’.
손인숙 씨의 작품인 ‘조가비 열쇠꾸러미’.
손 씨는 젊은 날엔 매스컴에 종종 나왔지만 “(밖으로 떠벌리면) 나 자신이 사라질까 두려워 20여 년간 언론에 나오지 않고 작품 활동에만 매진해 왔다”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곳을 찾아와 “한 땀 한 땀 떠내려간 정성이 기적을 이뤘습니다”라고 방명록에 썼다.

그의 ‘자수 미학’을 기사로 옮긴다는 건 내심 부담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고 해를 넘기는 동안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임권택 감독, 허영만 화백 등이 다녀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지난달 23일 다시 이곳을 찾아가 손 씨와 반나절 동안 인터뷰를 했다. 이날엔 박은주 김영사 사장, 김희진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과 교수 등도 발걸음을 했다. ‘개인이 가진 것(돈과 재능)’을 ‘한국의 자랑스러운 문화’로 바꿨다는 한 예술가의 집념이 지금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고 있다.

○ 역발상의 예술가

그의 작품은 신선하다. 뭐든 뒤집어 생각하는 역발상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우리 전통의 재현’은 옛것을 고스란히 베끼는 게 아니란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란다.

‘왜 우리 전통 귀주머니엔 손잡이가 없을까?’란 아쉬움으로 실크 손잡이를 달았더니, 멋스러운 한국의 핸드백이 됐다. ‘예술엔 남녀가 공존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여성의 노리개에 남성의 전통 흉배 장식을 했다. 나무 탁자의 윗면에는 홈을 내서 그 속에 각종 장신구를 전시하고 유리를 덮었다. “한 가지 용도로만 쓰기엔 아깝잖아요. 이렇게 전천후로 한국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걸요.” ‘한국의 보자기는 꼭 정사각형이어야 하나?’라며 매듭을 곁들인 직사각형 보자기도 만들었다. 늘 스스로에게 “왜 그러면 안 되나?”란 질문을 던졌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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