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詩의 거름이 된 또다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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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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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세계’ 16명 사연 소개

“고혈압으로 별세하기 3년쯤 전에 박목월 선생은 사모님과 함께 서울의 변두리 상계동에 있던 우리 집을 문득 방문하였다. 선생님을 대접해드릴 아무 준비도 없었지만 그날 어머니는 기르고 있던 닭을 잡고, 밭에서 갖가지 채소를 뜯어와 저녁밥상을 정성껏 마련했다.”

김종해 시인은 목월 선생과 우연히 함께한 저녁 자리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날 만남은 목월 선생 타계 후 20년이 지난 뒤 ‘현대시학’에 ‘저녁밥상’이란 시로 되살아났다.

‘스승 목월 내외분이 우리 집에 오셨다/상계동 저녁 어스름이 하늘에 깔리고/그 밑에서 불암산이 발을 씻고 있었다/목월은 지팡이로 불암산을 가리키며/그놈 참 자하산 같구나/저녁밥상 위에는 어머니가 손수 기른/닭 한 마리 올라와 있다/…’

시가 혼자의 머리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시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때론 동료, 선후배 시인들과 교류하며 독특한 착상을 얻는다. 계간지 ‘시인세계’ 봄호가 ‘내 시 속에 또 다른 시인이 걸어 들어왔다’는 기획 특집을 실었다. 자신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준 다른 시인과의 인연을 털어놓은 이 기획에 김종해 오탁번 정호승 신달자 등 시인 16명이 참여했다.

정호승 시인은 은사 김현승 시인을 떠올렸다. “상병 때이던가, 김현승 시인의 시를 흉내 낸 몇 편의 시를 그만 선생님께 우편으로 보내고 말았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숭실대에 재직 중이셨는데 ‘언제 휴가 나오면 학교로 한번 들르도록 하라’는 내용의 친필 엽서를 보내주셨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정 시인은 은사에 대한 흠모와 존경을 담아 ‘네가 나는 곳까지/나는 날지 못한다’로 시작하는 시 ‘꿀벌’을 쓴 뒤 자신의 첫 시집에 실었다고 밝힌다.

오탁번 시인은 자신의 시 창작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주저 없이 미당 서정주를 꼽았다. “까놓고 말하면, 내 시 속에 느닷없이 들어와서 나를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 시인은 미당이다. 시와 소설을 함께 쓰던 젊은 날의 나에게 서정주 말고 다른 시인들의 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 시인은 벌써 10년도 전에 미당을 ‘왕겨빛 그리움’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로 형상화한 ‘미당을 위하여’란 시를 썼다고 밝힌다. 문정희 시인 또한 미당 타계 전 병석에 있던 모습을 보고 시 ‘그의 마지막 침대’를 썼다.

김광규 시인은 자신의 첫 시선집의 해설을 써준 김영무 시인을 떠올리며 시 ‘똑바로 걸어간 사람’을 썼다. 최영철 시인은 김수영 시인의 시를 곱씹으며 ‘통렬한 자기 응시’를 배웠고, 이를 통해 시 ‘오체투지’를 펼쳐냈다고 털어놨다.

때론 한 줄의 농담에서 시 한 편이 탄생하기도 한다. ‘시름시름 앓는 나를 보고/문정희 시인이/신 선생 약은 딱 하나/산도적 같은 놈이 확 덮쳐 안아주는 일이라 한다/그래 그거 좋지/나는 산도적을 찾아/내일은 광화문을 압구정동을/눈웃음을 치며 어슬렁거려 봐야지/…’ 어느 4월 평온한 저녁, 커피를 함께 마시던 문 시인의 농담에 착안해 신달자 시인이 쓴 ‘산도적을 찾아서’다.

시인은 착실하게 다음과 같은 후기까지 남겼다. “며칠 전 택시를 탔는데 글쎄 기사가 대뜸 내게 묻는 게 아닌가. ‘문정희 시인이 처방한 거 이루어졌습니까?’ 아이고 맙소사! 그게 그렇게 소문이 났단 말인가. 산도적은 아직 멀기만 한데….”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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