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조선 최악군주는 당쟁 빌미 준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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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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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vs 중국황제/신동준 지음/536쪽/2만 원/역사의아침

조선과 중국 명·청조의 역사는 많은 부분이 겹친다. 먼저 조선과 명의 건국 시기가 비슷하다. 조선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 일어났다. 청이 몰락한 시기와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된 시기 역시 거의 일치한다. 이런 두 나라 역사의 중심에는 시대마다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도탄에 빠뜨렸던 군주가 있었다. 저자는 조선 국왕과 명·청 황제의 통치 스타일과 리더십을 비교 평가함으로써 두 나라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다.

○ 개국조, 태조 vs 홍무제

“주원장은 반란군의 선봉에 서서 새 제국의 주인이 된 데 반해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가 주도한 궁정쿠데타의 주역으로 선택돼 개국조가 됐다. 이는 이후 명제국과 조선조가 상이한 통치 행태를 보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성계, 즉 조선 태조는 원·명 교체기라는 국제정세를 발판 삼아 나라를 세울 수 있었지만 그 행보는 명 왕조를 열었던 주원장, 즉 홍무제와 차이가 있었다. 홍무제는 개국 직후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출사하지 않는 자를 가차 없이 탄압하며 황권 강화에 집중했다. 이와 달리 태조는 고려의 유신을 자처하는 자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특히 태조를 역성혁명으로 이끌었던 정도전이 신권(臣權) 위주의 왕도(王道)를 내세웠기에 왕권 강화에 한계가 있었다.

저자가 태조보다 태종을 진정한 개국의 주역이자 ‘조(祖)’의 묘호를 받아 마땅한 당대의 명군으로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태종은 정도전 등 여러 권신을 제압하고 태조가 하지 못했던 왕권 강화를 이룩했다. 국가재정을 확충키 위한 최초의 지폐 저화(楮貨)를 발행하고 북방 경계를 강화하는 등 세종대 태평성대의 발판을 마련한 주인공도 태종이었다.

○ 암군(暗君), 선조 vs 만력제

저자가 군주의 리더십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은 ‘왕권을 어떻게 강화했느냐’다. 왕권이 신권에 흔들리며 당쟁이 일어나면 국가가 위기에 빠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선조와 만력제를 양국 최악의 군주로 꼽는다. 후계자 옹립, 즉 국본(國本) 문제를 방치함으로써 당쟁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만력제가 등극하기 전부터 명은 후사 문제로 당쟁이 격화돼 황제의 목숨이 위협받을 정도였다. 만력제는 이 같은 상황에서 무려 25년간 조정에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황태자를 정하지 못한 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이를 선조가 서차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도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세자책봉 가능성을 열어놓은 일에 비유한다. 저자는 광해군을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닦은 왕이자 백성의 이익을 앞세우고 국제정세를 읽는 데 탁월했던 군주로 평가한다. 그런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하고, 결국 병자호란으로 이어진 것은 선조가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정조(왼쪽)와 청나라 건륭제는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저자는 두 왕이 사망한 직후부터 조선과 청이 급격히 쇠락했다는 점을 들어 두 왕이 통치하던 때 이미 망국의 단초가 보였다고 평가한다. 사진 제공 역사의아침
정조(왼쪽)와 청나라 건륭제는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저자는 두 왕이 사망한 직후부터 조선과 청이 급격히 쇠락했다는 점을 들어 두 왕이 통치하던 때 이미 망국의 단초가 보였다고 평가한다. 사진 제공 역사의아침

○ 망국의 단초, 정조 vs 건륭제

청은 건국 후 강희제와 건륭제로 이어지는 이른바 강건성세(康乾盛世)의 태평성대를 보낸다. 이 시기 조선의 국왕은 숙종 영조 정조였다. 이들의 정치스타일은 서로 닮았다. 강희제가 재위 8년에 신권세력의 상징인 오배를 제거한 것은 5년 뒤 숙종이 갑인환국을 통해 송시열과 서인세력을 제압한 것과 유사하다. 시장경제가 발달해 상공업자가 활약하고 백성의 살림이 나아진 것 역시 이때의 일이다. 청의 고증학이 조선에 영향을 미쳐 실학사상이 발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건륭제와 영조 정조의 치세에서 훗날 망국의 단초를 찾는다. 영조의 탕평치지는 붕당을 막았지만 외척을 중용하는 등 훗날 세도정치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정조의 ‘군주도통설(君主道統說·군주가 성리학의 적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을 “뛰어난 호학(好學)기질에도 신권세력과 지혜를 다투는 쟁지(爭智)를 행해 정작 중요한 국가통치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군주도통론은 오히려 노론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정조의 입지를 좁혔다는 것. 결국 정조가 급서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벽파는 정조 지지세력을 대거 숙청했다. 이후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의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며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건륭제 역시 성군이었지만 서양과의 무역을 허락하지 않은 채 주변국을 오랑캐로 얕잡아보는 잘못을 범했다. 만주족 남자들이 한족 사대부의 복장을 따라하는 등 만주족 특유의 상무정신이 사라져가기 시작한 것이나 아편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건륭제 후기부터다. 저자는 “정조와 건륭제 모두 자부심이 너무 강했다”고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고종과 동치제 광서제를 비교한다. 순종 때 망국의 치욕을 겪기에 앞서 고종 때 국권이 침탈당한 것처럼 광서제 역시 실질적으로는 청의 마지막 황제였다. 동치제의 양무운동과 고종의 광무개혁 역시 주체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비교할 만하다. 저자는 “양무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한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 학계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광무개혁을 시도한 고종을 암군으로 몰기보다는 당대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21세기 동북아시대의 향후 좌표를 설정하는 데 표상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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