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려 일제는 덕수궁을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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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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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경 덕수궁 대안문(현 대한문) 앞의 모습. 1897년 대한제국 출범 뒤 서울의 새 중심으로 자리 잡아가던 시기다. 사진 제공 문화재청
1901년경 덕수궁 대안문(현 대한문) 앞의 모습. 1897년 대한제국 출범 뒤 서울의 새 중심으로 자리 잡아가던 시기다. 사진 제공 문화재청
◇덕수궁/안창모 지음/268쪽·1만5000원·동녘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다. 임진왜란 뒤 잿더미만 남은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가 지친 몸을 의탁했던 월산대군의 옛 사저. 이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이 궁을 넓히고 ‘나라의 운을 기리는’ 이름을 붙였다. 그로부터 296년 뒤,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왕위를 잃은 고종황제가 이곳에 혼자 남겨지면서 ‘장수를 기원하는’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첫 왕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한 뒤 개성으로 가서 머물렀던 궁의 이름도 덕수궁이었다.

한반도 역사의 기록에서 대한제국의 위상은 애매모호하다. 1902년 9월 13일 완공됐다가 1904년 4월 14일 화재로 사라진 덕수궁 정전 ‘중화전’의 역사는 짤막했던 제국의 기억을 얄궂게 상징한다.

책의 부제는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로 붙였다.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인 지은이는 이미 기울어진 나라의 명운을 끌어안은 채 서서히 무너져 내린 왕궁의 상흔을 꼼꼼히 되짚어 담았다. 나란히 삽입한 과거와 현재의 사진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고종은 덕수궁을 근대 제국의 심장부로 만들려고 했다. 1897년 러시아 공사관 도피 생활을 마친 고종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곳이 여기다. 궁 정문인 대안문(大安門) 명칭은 ‘한양(漢陽)을 창대하게 만든다’는 뜻을 담아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외세에 짓눌려 사그라지던 국운을 다시 세워 높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덕수궁 석조전은 일제가 세운 경복궁과 창경궁의 서양식 건물과 달리 대한제국이 주도해 만들어졌다. 1893년 발의돼 설계에만 2년을 들였다. 서구식 근대국가로 변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낼 건축물로 계획된 것이다. 하지만 1900년 시작한 석조전 공사는 고종이 물러난 뒤인 1910년에야 마무리됐다. 야심 차게 마련한 이 신식 건물은 국빈을 대접하는 만찬장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덕수궁을 공원으로 개방한 일제는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다시 꾸몄다. 한반도에 근대 제국의 태동이 있었다는 기억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우려 한 것이다.

덕수궁은 경복궁을 향해 뻗은 육조거리를 한참 거슬러 내려와 서쪽으로 비껴 앉은 자리에 있다. 지은이는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고 백성의 삶 한가운데 자리 잡으려 했던 궁궐”이라며 “경복궁과 육조거리가 조선의 상징적 장소였다면 덕수궁과 대한문 앞 광장은 근대 한국의 근본 공간”이라고 해석했다.

광복 뒤에도 덕수궁의 위상은 계속 낮아졌다. 1968년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궁 담장이 없어지고 철창이 서기도 했다. 이때 도로 한복판에 나앉았던 대한문은 2년 뒤 서측으로 밀려나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덕수궁 외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수난사를 아울러 파헤친 ‘궁궐의 눈물, 백 년의 침묵’(효형출판)과 비교해 읽기를 권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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