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 아니면 누가 하겠나” 국악-무용등 비인기예술 적극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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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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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民 김상만 선생 탄생 100주년展

각종 콩쿠르 창설 신인 발굴 나서
관련 문화자료 - 애장품 620여 점
내달 28일까지 일민미술관 등 전시

시사만화가 백인수 화백이 1969년 그린 일민 선생 캐리커처.
시사만화가 백인수 화백이 1969년 그린 일민 선생 캐리커처.
《일민(一民) 김상만 선생(1910∼1994)은 문화주의자였다. 일민 선생은 동아일보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장남으로 1949년 입사 후 반세기 가까이 동아일보에 재직하며 문화 발전과 언론 자유에 열정을 쏟았다.

일민 선생은 문화에 대해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문화가 통일되면 정치적 통일이 앞당겨진다고 나는 믿는다. 문화가 약하면 무력통일을 해도 결국 지게 된다. 선친께서는 단정(單政·단독 정부)에 헌신했으나 통일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문화가 우위에 서면 통일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다고 믿는다.”

‘문화의 힘’을 믿었던 일민 선생은 1961년 동아일보 전무이사 겸 발행인에 취임한 뒤 문화사업에 적극 나섰다. 동아음악콩쿠르(1961년) 같은 예술분야의 신인 등용문을 창설해 문화 발전의 도약대를 만들었으며 영국 로열발레단(1978년) 등 해외 유수 공연 단체를 초청해 수준 높은 문화를 국내에 소개했다.》

일민미술관은 일민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민의 문화-세계의 문화, 전통의 문화’전을 19일부터 다음 달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1층 로비와 일민미술관 3층 전시실에서 연다. 전시에는 동아일보의 각종 문화사업에 관한 자료, 사진, 기사와 함께 일민 선생이 수집해온 미술품, 명사들의 필적, 대통령 휘호 620여 점을 선보인다. 김태령 일민미술관 관장 겸 기획실장은 “일민 선생의 평소 생활과 문화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자리이자 20세기 중후반 국내 문화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관람은 무료. 02-2020-2055

○ 세계적 공연단체 초청… 문화 확산 주력

‘일민의 문화-세계의 문화, 전통의 문화’전 개막을 이틀 앞둔 17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1층에서 시민들이 관련 전시물을 미리 살펴보고 있다. 김동주 기자
‘일민의 문화-세계의 문화, 전통의 문화’전 개막을 이틀 앞둔 17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1층에서 시민들이 관련 전시물을 미리 살펴보고 있다. 김동주 기자
일민 선생은 1961년 동아음악콩쿠르의 창설을 시작으로 명인명창대회(1962년) 동아사진콘테스트(1963년) 동아무용콩쿠르 동아연극상(이상 1964년) 민속공예전(1967년)을 잇달아 열었다. 당시 동아일보 내에서는 “적자가 나는 사업을 왜 하느냐”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일민 선생은 “동아일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며 설득했다. 동아일보는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1970년) 동아미술제(1978년) 동아국악콩쿠르(1985년) 등을 창설하며 국내 문화 활동을 확산시켰다.

일민 선생은 동아일보가 세계적인 공연 단체를 초청해 수준 높은 문화의 장을 마련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1년 미국 줄리아드 현악 사중주단 공연을 비롯해 독일 베를린 실내오케스트라(1962년)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64년) 이무지치 실내악단(197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실내관현악단(1976년) 등이 동아일보 초청으로 내한했다. 1979년 독일의 세계적 안무가 피나 바우슈가, 1984년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끄는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동아일보 주최로 처음 한국을 찾았다. 전시에는 당시 공연 포스터와 함께 베를린 실내오케스트라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방한 당시 연주를 녹음한 것을 직접 들어볼 수 있다.

○ ‘수집광’ 일민 선생의 면모

일민 선생은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보관하도록 노력했던 ‘수집광’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옛 사옥(현 일민미술관)과 수장고, 사무실 벽장, 책상 서랍에 꼼꼼히 모아놓았던 자료들은 현대문화사 관련 책을 엮어낼 정도로 방대했다. 일민 선생이 수집한 미술품은 일민문화재단을 세우는 밑거름이 됐고, 그가 보관해둔 신문인쇄기계와 활자를 바탕으로 동아일보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 국내 최초의 신문박물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

일민 선생은 신동아, 여성동아, 음악동아 등에 게재하거나 연재한 표지화, 삽화, 신년축하그림, 휘호, 명사 원고도 보관했다. 이번 전시에는 화가 송영방의 여성동아 표지화(1968년 8월호), 화가 박광진의 신동아 표지화(1966년 12월호) 등 여성동아 표지화 16점, 신동아 표지화 38점을 선보인다. 일민 초상화와 기념액자 12점, 표창장과 메달, 만년필 등 애장품 40여 점도 전시한다.

일민 선생은 사진과 음원 기록에도 관심이 컸다. 해외 출장을 가거나 유명 인사를 만날 때 어김없이 사진을 찍었고, 즐겨 듣던 클래식 녹음테이프도 귀중하게 보관했다. 당시 드물었던 무성 영상 녹화기에 가족의 정겨운 한때를 담기도 했다. 전시는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의 1992년 내한 당시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사진을 선보이며 전국 77개 범종의 소리를 담은 ‘한국의 범종’(1966년 한국문화재연구회) LP를 포함해 일민 선생이 즐겨 듣던 LP 19점도 전시한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김상만 선생이 남긴 족적
독재에 대항 자유언론 수호… 꿈나무재단 설립 등 교육사업도 헌신

1992년 방한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오른쪽)를 일민 선생이 서울 종로구 계동 인촌기념관으로 초대해 안내하고 있다.
1992년 방한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오른쪽)를 일민 선생이 서울 종로구 계동 인촌기념관으로 초대해 안내하고 있다.
일민 김상만 선생은 독재정권에 대항해 자유언론 수호에 힘썼으며 폭넓은 대외활동으로 한국 언론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일민 선생은 1971년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뒤 동아일보에 기고한 ‘공명정대한 독립지 지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본보는 창간 이래 민주주의를 지지해 왔습니다. 앞으로 본보는 민중의 벗이 될 것이며 민권신장의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1974∼75년 박정희 정권에 의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 1980년 신군부의 언론강제통폐합에 의한 동아방송 강탈 사건을 겪으면서도 ‘정론직필’의 정도(正道)를 지켜나갔다.

일민 선생은 당시 권력에 휩쓸리지 않는 유일한 방송이었던 동아방송이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1971년 동아방송 사원들과의 만남에서 “동아방송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이성을 기초로,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63년 개국한 동아방송은 다양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내보내며 개국 1년 만에 청취율 1위로 올라섰다. 1969년 시작한 30분짜리 뉴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뉴스 쇼’는 주요 뉴스, 특파원 코너 등을 엮어 현재와 같은 뉴스 프로그램의 틀을 마련했다. 심층 취재와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 드라마는 동아방송의 상징이었다. 라디오칼럼 ‘앵무새’는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1975년 일민 선생은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가 매년 글이나 행동으로 언론자유에 기여한 인사에게 수여하는 ‘언론자유 금펜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FIEJ는 “1974년 정부의 엄격한 언론통제에 대항해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주저 없이 이를 기사화하고, 편집국에 상주해 온 정보원을 내쫓고 정부에 언론자유를 요구한 한 신문사의 용기 있고 책임 있는 행동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 상은 국내 사정으로 인해 1982년도에 받았다. 일민 선생은 1985년 미국 미주리대로부터 언론공로상과 메달을 받았다. 그해 미주리대는 동아일보를 ‘85년의 가장 훌륭한 언론’으로 선정했다.

일민 선생은 1982년 고려중앙학원재단 이사장을 맡은 뒤 고려대 서창캠퍼스의 개편 확대, 의과대학 확충 등에 나서면서 교육 사업에도 헌신했다. 1985년에는 독지가들의 기탁금과 동아일보 출연금으로 재단법인 동아꿈나무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동아꿈나무재단은 이후 장학금 지급, 학술 연구비 지원, 청소년 선도사업을 꾸준히 해왔다.

일민 선생은 또 1930년대 런던대에서 유학한 것을 계기로 1964년 한영협회 회장에 취임했고 1980년에는 이 대학의 명예 펠로로 선출됐다. 이듬해에는 영국 명예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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