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데려와 껴안고 춤을 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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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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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인 해외 기행문 분석
이승원 교수 ‘세계로 떠난…’ 펴내

서구식 제도를 도입한 19세기 말 일본의 근대식 학교. 당시 일본을 방문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의무교육’이나 ‘체육활동’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주자학보다 서양의 실용 학문을 중요시하는 모습엔 실망했다. 사진 제공 휴머니스트
서구식 제도를 도입한 19세기 말 일본의 근대식 학교. 당시 일본을 방문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의무교육’이나 ‘체육활동’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주자학보다 서양의 실용 학문을 중요시하는 모습엔 실망했다. 사진 제공 휴머니스트
‘모든 문무고관들이 자기의 부녀를 거느리고 와서…둘씩 서로 껴안고 밤새도록 춤을 췄다. 그 광경은 비단 같은 꽃떨기 속에서 새와 짐승들이 떼 지어 희롱하는 것 같았다.’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체포하라는 고종의 명을 받고 일본에 간 유학자 박대양은 1885년 3월 9일 일본의 육군경(陸軍卿) 오야마 이와오(大山巖)의 초청으로 참석한 로쿠메이칸(鹿鳴館) 연회에서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아연실색한 뒤 이런 기록을 남겼다. 서양에서 들어온 왈츠를 몰랐던 그는 남녀가 부둥켜안고 춤추는 모습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연회장에서 악수를 청하는 여성의 태도에서도 충격을 받았다. ‘창부(娼婦)나 주모(酒母)의 손도 일찍이 한번 잡아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이런 경우를 당하니 당황했다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근대 전환기 정치외교사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치호는 서구 문명을 일찍 접한 뒤 ‘강력한 국가’를 열망했다. 정의로운 신이 왜 조선인은 약하게 만들었을까, 왜 ‘그들’은 우리보다 강한 것일까라는 것이 그의 평생 화두였다.

근대기 해외를 여행한 조선인들의 기행문에는 당시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00년 전후 조선인의 기행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원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휴머니스트)을 펴냈다.

외국 문명에 대한 당시 인물들의 일차적 반응은 ‘부러움’이었다. 1896년부터 1년 동안 유럽을 방문한 조선 말기 문신 민영환은 전화를 보며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던 것”이라고 했고, 거리에 설치된 가스등 불빛은 “너무 밝아서 별과 달빛을 빼앗는다”고 표현했다. 1893년 미국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정경원은 ‘길가의 백성들이 대통령을 봐도 경례하지 않는 모습’에서 미국의 평등권이나 민주주의 원리를 목격했다.

이 교수는 “당시 지식인들은 서구의 근대 문물을 표상할 수 있는 지적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아 ‘형언할 수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앞선 문물에 부러워하면서도 당대의 엘리트답게 냉철한 시각을 잃지 않았다.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이순탁은 1930년대 초 영국을 방문한 뒤 “기독교주의자, 인도 독립단, 공산주의자 등이 각자 입장을 주장해도 아무런 억압을 받지 않는 나라”라고 평가하면서도 대공황 직후 런던의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먹다가 내버린 꽁초 주워 빨고 가는 사람, 쓰레기통 뒤져 보는 사람…. 그래도 옛날의 호화를 자랑하듯 중산모 쓴 사람, 또 혹은 각종 훈장 찬 사람을 찾기에 드물지 않은 것도 한 기관(奇觀)이라 할까.’

이 교수는 “당시 기행문들에선 외국의 문물과 조선의 현실을 비교하며 절망하면서도 예법이나 윤리처럼 조선이 앞선 점을 내세우며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모습이 엿보인다”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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