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신 PD의 반상일기]승부처 ‘머리 들이밀기’의 심리학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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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삼성화재배 준결승 3번기에서 이창호 9단과 대결한 중국의 추쥔(邱峻) 8단은 바둑 두는 모습만 보면 인파이터 스타일이다.

그가 등장하면 방송 제작진은 긴장한다. 대국을 생중계할 때는 바둑판 위 천장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사들이 돌 놓는 모습을 담아 현장감을 살린다. 그런데 추 8단은 수읽기를 위해 바둑판 위로 머리를 들이미는 ‘머리 공격’을 하기 일쑤다. 시청자들은 바둑판의 절반가량을 보지 못하고 추 9단의 뒤통수만 보게 된다. 삼성화재배 3번기 중계 때 추 8단의 머리 들이밀기는 여전했다.

방송 대국에서 바둑판을 가릴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기사들이 한국에도 여럿 있다. 시청자에게 양질의 화면을 제공하려는 제작진은 전전긍긍 머리가 화면 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리다 계시원을 통해 조심스레 손짓을 하도록 시키지만 수읽기에 몰입한 기사들에겐 별무신통이다.

머리를 잘 ‘쓰는’ 기사로 소문난 윤성현 9단에게 그 심리를 들어봤다.

“승부처다 싶을 때 정밀한 수읽기를 위한 겁니다. 시간은 없고 수는 안 보이고 머리를 들이밀 수밖에요.”

심리적으로 바둑판 바로 위에서 수를 보면 더 잘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대부분 바둑이 잘 안 풀릴 때 ‘머리 들이밀기’가 벌어진다. 머리를 바둑판에 바짝 붙이는 자세는 스스로 불리하다는 신호일 뿐 아니라 의자 뒤로 기대어 앉은 상대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양새라 기세로도 좋지 않다고 한다. 한 곳의 변화에 집중하느라 판 전체의 조망을 놓치기도 쉽다.

“대국 전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는데 저도 모르게 머리가 들어가 있어요. 저는 중간에라도 깨닫고 빠지는데 오히려 점점 들어가는 기사들도 있죠.”(윤 9단)

머리 공격의 대가 두 사람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근 한국바둑리그에서 이 분야 남녀 대표 선수라 할 수 있는 김성룡 9단과 루이나이웨이 9단이 격돌했다. 초반부터 슬슬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분위기가 달아오른 중반 무렵 두 기사가 거의 머리를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었다. 두 기사 머리 사이로 바둑판의 정중앙인 천원(天元)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담당 PD는 얼굴이 하얘졌고 기상천외한 장면에 시청자들은 배꼽을 잡았다고 한다.

‘머리 들이밀기’는 바둑에서만 볼 수 있는 몰입 현상이다. TV 중계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시청자들에겐 답답해하지만 말고 긴박하게 가동되는 기사들의 두뇌 회로를 상상의 투시카메라로 한 번 들여다보길 권하고 싶다. 주로 머리를 쓰는 경기에 머리가 등장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

이세신 PD의 반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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