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열흘만” 어렵게 빌린 ‘몽유도원도’ 다신 못 볼 수도

  • 입력 2009년 10월 1일 02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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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몽유도원도’ 두루마리를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들.
30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몽유도원도’ 두루마리를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들.
두루마리엔 ‘몽유도원도’ 그림과 23편의 발문이 들어 있다. 이 작품은 7일 오후 9시까지 전시된 뒤 다음 날 오전 일본으로 돌아간다. 전영한 기자
두루마리엔 ‘몽유도원도’ 그림과 23편의 발문이 들어 있다. 이 작품은 7일 오후 9시까지 전시된 뒤 다음 날 오전 일본으로 돌아간다. 전영한 기자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1월 8일까지 열리는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특별전 ‘여민해락(與民偕樂·백성과 함께 즐긴다)’. 전시작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단연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다. 일본 나라(奈良) 현의 덴리(天理)대에서 빌려온 것으로 1986년, 1996년에 이어 세 번째 국내 전시다. ‘몽유도원도’의 전시 기간은 9월 28일부터 10월 7일까지 불과 열흘. 일반 관람 이틀째인 30일 하루만 해도 3000여 명이 다녀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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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흘만 전시하는 이유

덴리대는 애초에 그림을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설득 끝에 덴리대는 올해 초 ‘짧은 대여’를 결정했다. 이후 전시 기간을 놓고 협상이 시작됐다. 중앙박물관은 20일을, 덴리대는 일주일을 제시했다. 결국 줄다리기 끝에 10일로 타협을 봤다. 야간개장일인 7일 오후 9시 ‘몽유도원도’ 전시가 끝나면 곧바로 포장에 들어가 다음 날 오전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다. 이번 전시를 위해 덴리대는 ‘몽유도원도’의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고 강화처리를 하기도 했다. 앞으로 ‘몽유도원도’를 국내에서 다시 볼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작품 호송에 참여했던 중앙박물관의 전인지 학예연구원은 “덴리대 관계자가 ‘앞으로 전시는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몽유도원도’를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전했다.

○ 20m에 이르는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는 그림 부분과 발문을 포함해 두 개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두루마리의 길이는 각각 11.2m, 8.57m. 두 개를 합하면 전체 길이는 20m에 달한다. 그림 부분은 38.6×106.2cm. 애초 그림은 이보다 더 컸다. ‘몽유도원도’ 전문가인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림을 보면 상하 좌우가 조금씩 잘려나갔음을 알 수 있다”며 “아마 장황(표구) 과정에서 그림이 잘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발문은 안평대군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성삼문 등 세종시대의 22인이 쓴 찬사의 글 23편이다.

○ “간송 전형필이 알았더라면…”

‘몽유도원도’가 언제 일본으로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그림이 일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93년 11월 일본 규슈 가고시마의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1939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됐으나 현재는 중요문화재이다. 약탈이 아니라 거래 등을 통해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반환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몽유도원도’가 돌아올 기회도 있었다. 1950년 한국인 고미술상이 작품을 들고 부산에 나타났다. 당시 컬렉터였던 손재형(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찾아온 사람), 이영섭 등에게 작품을 보였고 구매자를 수소문했다. 당대 컬렉터였던 간송 전형필에겐 이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결국 ‘몽유도원도’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5년경 ‘몽유도원도’는 덴리대로 넘어갔다. 이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 이원복 학예실장의 아쉬움. “1950년 간송이 그 소식을 들었더라면 틀림없이 작품을 구입했을 텐데요.”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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