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문화프롬나드 3] 바이올린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 입력 2009년 9월 30일 16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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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없이 금호아트홀을 찾았다. 오늘 저녁 하루쯤은 음악과 오롯이 동행하고 싶다.

금호아트홀에서는 이혜원씨의 바이올린 독주회가 있었다. 월요일 저녁에는 대부분의 공연이 쉬지만 클래식만큼은 종종 무대를 마련한다.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공연시간이 거의 임박해 연락을 했음에도 주최측은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공연장에 앉아 무료 프로그램을 뒤적인다. 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이혜원씨가 바이올린을 들고 정면을 향한 사진이 표지에 실려 있다. 꽤 미인이다 싶다. 무엇보다 투명하면서도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프로그램에는 ‘섬세하면서도 파워풀한 테크닉’ 운운 … 이라고 적혀 있었다. 프로그램이란 것이 어느 정도 과장되기 마련이니 “흠, 과연 그럴까?”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기로 한다.

객석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공연이 시작된다. 핑크와 초록색 문양이 들어간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연주자가 피아니스트와 함께 무대로 걸어 나왔다. 바이올린을 턱에 끼울 때 받치는 헝겊도 핑크색. 그러고 보니 프로그램 표지 사진에서도 이씨는 핑크색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첫 곡은 드보르작의 로망스. 드보르작에게도 이런 감성이 있었나 싶다. 저 유명한 9번 심포니 2악장의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연주 또한 절묘한 것이어서, 이런 연주를 두고 결코 ‘평범한 연주’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평범하지는 않다.

뭐랄까, 슬프되 힘이 차 있다. 흔들리되 명료하다. 이렇듯 ‘힘찬 슬픔’과 ‘명료한 흔들림’을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호불호의 문제가 아닌, 평범과 비범의 문제다.

이혜원씨가 바이올린을 통해 내는 음색은 확실히 저음이 괜찮게 들렸다. 고음을 잘 연주하는 연주자는 많다(물론 상당히 어렵지만). 하지만 저음이 매력적인 연주자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씨의 저음은 우람하면서도 뭐라 말하기 힘든 품격이 있었다. 반면 고음은 다소 밋밋하게 들렸다. 실처럼 가늘게 고음을 뽑아내야 하는 장면에서 음이 이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두 번째 곡은 다리우스 미요의 ‘지붕 위의 소’라는 곡이다. 미요는 리듬감이 탁월한 작곡자로 변박이 주특기였다. 불멸의 재즈넘버 ‘테이크 파이브’를 남긴 데이브 브루벡이 미요의 제자라는 점을 떠올리면 스승의 음악을 상상할 수 있다.

과연 ‘지붕 위의 소’는 리듬이 불을 뿜는 듯한 열정적인 작품이었다. 바이올린도 바이올린이지만 피아노(박미정)의 터치가 일품이다. 툭툭 치는 듯한데 음이 공연장 구석구석을 울렸다.

뭔가 가슴이 후련해지는 연주다. 긴 카덴차의 터널을 뚫고 나온 바이올린이 피아노와 합류할 때는 뭔가가 속에서 ‘탁’ 터지는 듯한 청량감마저 들었다.

2부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10곡 중 5번 ‘봄’과 함께 가장 유명한 곡이다. 크로이처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본래 베토벤은 9번 소나타를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브리지타워를 위해 썼다. 그런데 작품이 완성될 즈음에는 베토벤과 브리지타워의 사이가 벌어졌던 모양이다.

결국 베토벤은 9번 소나타를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크로이처에게 헌정을 했고, 이 불멸의 작품은 ‘크로이처’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는 얘기이다.

문제는 이 크로이처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곡이 자신을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이 곡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후문도 있다.

각설하고, 이날의 크로이처는 ‘대단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는 크로이처라니. 이 곡이 이렇게 거칠고 야성적이었던가 싶다. 불을 뿜어대는 드래곤 두 마리가 허공에서 얽힌 채 싸우고 있는 느낌이다. 듣고 있자니 자꾸만 어깨가 움츠려든다.

무대 위에서 두 사람은 시종 바이올린의 활을 ‘긁어대고’, 피아노의 건반을 ‘난타’했다. 특히 이혜원씨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혹사를 시켰다. 내가 바이올린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1악장이 끝난 뒤 솔직히 박수를 치고 싶었다(물론 치지 않았다). 이럴 땐 ‘악장 중에는 박수를 치지 마시오’라고 정해놓은 누군가를 쥐어박고 싶어진다.

마침내 크로이처도 끝났다. 사람들은 세 차례나 연주자들을 무대로 불러냈고, 이씨는 잘 알려진 찬송가의 선율을 앙코르곡으로 연주했다.

상큼하고 활력을 만들어주는 연주회였다. 이런 식의 하드보일드한 연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정쩡한 보편성보다는 이렇게 확실하게 ‘나가버리는’ 연주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프로그램을 접어 가방 속에 곱게 넣어 두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날의 크로이처는 정말 대단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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