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티베트 산골마을에 고무타이어가 들어온 날

  • 입력 2009년 9월 12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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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집 ‘소년은 자란다’의 표제작 주인공 ‘거라’. 마을사람들로부터 사생아라고 손가락질을 받지만 뜻하지 않게 곰을 잡은 뒤 부쩍 성장한 자신을 느낀다. 사진 제공 아우라출판사
연작소설집 ‘소년은 자란다’의 표제작 주인공 ‘거라’. 마을사람들로부터 사생아라고 손가락질을 받지만 뜻하지 않게 곰을 잡은 뒤 부쩍 성장한 자신을 느낀다. 사진 제공 아우라출판사
◇소년은 자란다/아라이 지음·전수정 양춘희 옮김/264쪽·1만 원·아우라

200여가구 사는 마을 배경 연작소설
선굵고 생생한 묘사 - 흡인력 돋보여

중국 소수민족인 장족의 전통을 간직한 티베트 자치구의 작은 마을 지촌. 티베트족 출신 작가 아라이가 200여 가구가 어울려 살아가는 지촌 사람들을 연작소설로 형상화했다.

티베트족은 1950년대 이후 수많은 정치적 변혁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종교와 문화가 균열과 붕괴의 위기를 맞는다. 한족 문화의 침투와 정치경제적인 변화라는 역사의 거시적인 흐름을 배경으로,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마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수록 작품에는 환속한 라마, 양치는 아이들, 마을의 사생아, 난폭한 절름발이와 사냥꾼 등이 등장한다. 짧지만 탄탄하게 엮인 이야기들, 양을 치고 나물을 캐면서 살아가는 순박한 지촌 사람들이 보여주는 순진무구한 세계는 감동적이다. 지리적, 시간적으로 동떨어진 곳의 이야기지만 거리감을 느끼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마부’는 지촌의 마지막 마부인 곰보에 관한 이야기다. 1950년대의 어느 날 지촌에 신기한 물건이 들어온다. 고무 타이어가 달린 바퀴다.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다. “가장 불가사의한 일은 바퀴 외부와 내부 사이에 압축된 공기를 가득 채우면 고무와 강철이 결합하면서 특별한 마법을 만들어내 허무하고 몽롱한 공기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바퀴는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마차’의 부속품이었고, 마차의 기수는 천연두가 남기고 간 자국이 가득한 곰보였다. 마을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곰보는 의기양양하게 두 필의 말로 마차를 몰아 빠른 속도로 마을 밖 큰길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하지만 지촌의 변화 속도는 그 바퀴보다 빨랐다. 몇 년 후 트랙터가 등장한다. 지촌 사람들은 트랙터의 위력에 감탄하느라 마차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마차가 백년 천년 사용할 수 없고 역사적 무대에서 퇴출될 것임”을 모르고 애지중지하던 곰보는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트랙터의 페인트칠이 벗겨지기도 전에 말은 늙어버리고 마차는 비바람에 마모돼 고물이 된다. 늙은 말들과 산속에 들어간 곰보는 그곳에서 말이 하나씩 죽어가는 것을 보며 숨을 거둔다.

학식 높은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였으나 ‘기생충 같은 생활’ ‘사악한 종교 활동’을 그만두라는 정부의 금령으로 사원에서 쫓겨나 강제로 환속한 라마들을 다룬 작품들도 여러 편이다.

‘라마승 단바’는 사원의 자바(비구승)였던 단바가 사원에서 쫓겨난 뒤에도 속세의 유혹을 이기고 라마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냈다. 환속해 지촌으로 쫓겨온 단바는 시간이 흘러 종교 활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자 다시 사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원은 이미 예전 같지 않다. 주지의 부탁으로 각 마을과 단체에서 사원 복구비용을 모금하는 데에만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던 단바는 결국 세월을 헛되이 보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순수한 구도와 고행을 위해 사원을 떠나 동굴로 들어간다.

역자의 말처럼 작가는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과욕” 없이 단순하면서도 선 굵게 인물의 생애를 보여준다. 티베트인들을 생생히 그려내는 소설의 흡인력이 마술 같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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