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동아일보 독자투고란 ‘자유종’ 일제관료 비판 등 역동적 의사소통의 場”

  • 입력 2009년 5월 27일 02시 49분


이기훈 목포대 교수 일제강점기 신문 분석 논문

“이혼 비판 투고에 반론 맞붙어 20여일간 논쟁도”

“고발과 논평, 호소, 비판, 제안 등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시도됐고 투고자들 사이 격렬한 논쟁도 전개됐다. 동아일보의 ‘자유종(自由鍾)’은 근대 지식이 수용되고 소비되면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역동적인 (의사소통의) 장이었다.”

1920년대 동아일보의 독자투고란인 ‘자유종’이 일제강점기 조선 지식인의 근대 사상 수용과 이해의 가교가 됐다고 분석한 논문이 나왔다. 이기훈 목포대 교수(한국사)는 역사학회(회장 노명호) 주관으로 29, 30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전국역사학대회에서 ‘1920년대 언론매체와 소통 공간-동아일보 자유종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1920∼1926년 동아일보 자유종에 실린 독자투고 750여 편을 분석했다. 자유종은 지령(紙齡) 100호를 기념해 1920년 7월 25일 신문 1면 하단에 첫선을 보인 뒤 1926년까지 활발하게 게재됐으나 일제에 대한 비판이나 익명 기고에 따른 문제가 발생하면서 1927년 이후 간헐적으로 게재되다가 1929년 이후 사실상 사라졌다.

이 교수는 자유종의 영향력에 대해 “이전에도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에 독자들의 글이 실리기는 했지만 동아일보와 같은 사회적 파급력을 지니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예컨대 1924년 2월 16일 한 지방공무원의 세무행정을 비판하는 글이 실리자 며칠 뒤 관련 공무원이 반론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자유종이 관심을 끌자 조선일보도 1925년 1월부터 탁목조(啄木鳥)를 연재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자유종을 뜨겁게 달군 쟁점 중 하나는 ‘자유 결혼’이다. 1924년 8월 부모의 혼약을 거부한 여성의 사례가 게재되자 이 여성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나를 두고 논란이 붙었다. 주변 사람들이 부모의 강요에 따른 혼약이었다고 하자 결혼상대자가 상반된 주장을 폈고 급기야 당사자가 나서 시종 혼인을 거부했음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1925년 1월에는 한 여학생이 이혼하는 남성을 비판하는 글을 투고하자 ‘부적합한 결합은 빨리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과 ‘여성을 피해자로 만들 수는 없으니 남성이 참아야 한다’는 반론이 맞붙어 20일가량 논쟁이 이어졌다. 일제 행정이나 관료에 대한 비판의 글과 더불어 ‘유산자(有産者)의 공적 의무’를 강조하는 글도 여러 차례 게재됐다. 당시에는 신문사에 본명을 알리고, 지면엔 익명으로 게재하는 방식이었다. 요즘 거론되는 ‘제한적 인터넷 실명제’와 유사했던 셈이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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