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약자의 편에… 聖俗 아우른 현대사 큰어른

  • 입력 2009년 2월 17일 02시 56분


■ 87년 발자취

8남매중 막내… 일제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다” 쓰기도

1951년 사제 수품 - 1969년 47세때 한국인 첫 추기경에

유신 - 군사독재시절 명동성당 ‘민주화 성역’으로 만들어

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큰어른으로 격변의 역사에서 민주와 정의의 가치를 지켜온 수호자였다. 평생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의 편에 섰고 1970, 80년대 서울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한국 교회는 물론 현대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에서 가난한 집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의 소신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신부로서의 삶을 확신하지 못했다가 뒤진 공부를 만회하느라 3학년 때 읽은 수많은 성인의 이야기에 뜨거운 감동을 받아 신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일제강점기 동성상업학교 소신학교 졸업반 수신(修身) 과목 시험 때 “조선 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오자 시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릴 무렵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 선생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교장 선생은 그가 졸업한 뒤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 교장 선생이 바로 장면 박사였다.

이후 일본 조치(上智)대로 유학을 떠났다가 1944년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 남쪽 태평양의 한 섬에 있다가 광복을 맞아 194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1951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사제품을 받고 안동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고인은 가난한 주민들에게 고해성사를 받으며 형편에 따라 돈을 주고 이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게 했다. 김 추기경은 “풋풋한 첫사랑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듯 성직 생활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안동, 김천 본당 신부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올라 뮌스터대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에게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1963년 귀국해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지낸 뒤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고인은 1969년 47세 때 한국인 첫 추기경에 임명됐다. 2년 뒤 박정희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성탄절 미사에서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이라며 정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훗날 “그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발언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1972년 8월 9일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7·4남북공동성명이 평화 위장의 전쟁준비 수단이나 권력정치의 기만전술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한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촉구하고 사회 안정과 질서를 흔드는 비상조치를 남발하는 권력의 폭주를 엄계한다.”

10월 유신 이후 불법단체로 지목된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조종한 배후로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1993년 별세)가 체포되는 등 교회와 정부의 갈등이 깊어지자 1974년 박 대통령과 만났다. 박 대통령이 “종교가 정치, 경제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고유 영역에서 벗어난다”고 말하자 김 추기경은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의 어둠을 밝혀 주길 기대한다”며 “권력으로 언론 자유를 누르면 오히려 국민의 정부 불신이 심해져 국가안보를 해치는 결과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좌경이니 하는 비난도 있었지만 정작 그는 “격동기를 헤쳐 나오며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은 해 본 적 없고 약자들 편에 서서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는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광주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광주 문제를 완곡하게 언급했는데도 동아일보에 단신이 실린 것을 제외하면 어느 언론도 내용을 보도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때도 추모미사를 통해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1998년 격동의 30년 세월을 한국 천주교 수장으로 지내온 고인은 76세에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추기경을 지내며 항상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고 싶은 열망을 내비쳤고 그러지 못해 답답했다면서 “(추기경이라는)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8년 명동성당 축성 100주년 경축미사에서 “(명동성당은) 겨레와 기쁨과 고난을 함께했습니다. 이 사회를 밝히는 빛과 등대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서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삶이 그랬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동아닷컴 임광희 기자


▲동아닷컴 정주희 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