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33년 노벨 출생

  • 입력 2008년 10월 21일 02시 59분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

1888년 프랑스 신문이 게재한 부음기사의 제목이다. 알프레드 노벨과 실제 사망한 그의 형 루드비그를 혼동한 기사였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노벨이 사후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노벨상 제정을 결심하지 않았을까 하고 많은 사람은 짐작한다. 당시 그는 다이너마이트 발명가로 널리 알려졌는데, 시와 소설 쓰기를 즐기는 평화주의자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폭약이 강력한 전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꽤 힘들어했다.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노벨은 공학자인 아버지로부터 공학의 기초를 배웠다.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보인 꼬마는 16세 때 이미 유능한 화학자였고 5개 언어에 능통했다.

다이너마이트 발명과 폭탄 제조로 막대한 부를 쌓아갔지만 노벨은 고독했다. ‘나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 살고 나는 모든 곳에서 일한다’가 그의 신조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방랑자다.”(작가 빅토르 위고)

노벨이 뇌출혈로 사망한 뒤 유언장이 공개되자 가족과 친지를 비롯해 전 세계가 놀랐다. 워낙 과묵했던 노벨이 노벨상 제정에 대한 자신의 결정을 아무에게도 소상히 알리지 않은 까닭이다.

노벨은 과학 관련 수상 분야를 직접 정했는데 ‘학문의 여왕’ 수학이 제외된 것을 두고 추측이 분분했다. 노벨이 수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설부터 마지막 연인 소피 헤스가 자신을 버리고 뛰어난 수학자에게 가버린 일이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노벨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전기 작가들은 그에게 적어도 3명의 여인이 있었다고 전한다. 노벨의 비서였던 베르타 킨스키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옛 연인과 결혼했다. 그래도 노벨은 베르타와 평생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이어 갔다.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던 베르타의 영향으로 노벨은 노벨상에 평화상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1905년 베르타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제 해마다 10월이면 전 세계의 관심이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스웨덴으로 집중된다.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노벨상에 항상 찬사만 쏟아진 것은 아니다. 가치 있는 성과를 간과했고 의심스러운 성과에 상을 줬다는 비난도 받았다. 일부 수상자는 명예롭지 못한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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