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580쪽에 단 한편 長詩 “이 화상을 뭐라 부를꼬?”

  • 입력 2008년 7월 5일 03시 03분


◇ 거룩한 줄넘기/김정환 지음/580쪽·1만8000원·강

‘거룩한 줄넘기’는 당혹스러운 시집이다. 시집 두께가 웬만한 소설집에 맞먹는다. 500여 쪽에 1만2000행이 넘는다. 게다가 실린 시는 단 한 편. 스토리가 없으니 서사시도 아니고 연속성도 없으니 연작시도 아니다. 17개의 장으로 구분된 장시(長詩)다. 시인 스스로도 이렇게 묻는다. “이 화상을 뭐라 부를꼬?”

2007년 ‘드러남과 드러냄’으로 백석 문학상을 수상한 김정환(54) 시인. 이 시집을 집필하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요즘 시집은 출판사 청탁을 받아 20∼30편 정도의 시를 수록하는 게 일반화됐지만 짧은 시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평준화된 시 규격을 넘어 구도를 크게 잡아 보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1년여에 걸친 작업을 하면서 자신조차도 그 구도가 “이렇게까지 거대해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한국 시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형식으로 낯섦을 안겨 준 이 시집은 내용 면에서도 또 한 번 낯설음을 선사한다. 시를 쓰기 전 ‘안팎, 꽃과 새, 물고기…감각 요소들이 그렇게 떠오르고, 연결되기 시작하였다’는 시인의 말처럼 이 시는 온갖 사물과 개념에 대한 감각의 파장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마르두크, 최고신이자 모든 신/얼음의 음식과 고독의 경악. 흔들리는/침묵, 푸르른/전율과 생명의/내파. 그것도/거룩한 줄넘기는 아니다” … “너무도 낡은 CD 타이틀보다/훨씬 더 많은 것을 더 가볍게 담는/감량은 있다//그 감량이 진정한/진보다. ‘진정성’의/어감도 감량한다”.

시는 로마자로 번호가 붙은 1장부터 16장까지 전개된 후 ‘사랑노래-補遺’로 마무리된다. 각 장의 전개에서 일관성이나 연결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시인은 “(긴 시니까) 쉬어가자는 의미다. 논문을 쓸 때 번호를 붙이듯이 맥락이나 분위기도 매듭을 짓고 넘어가자는 것”이라며 “통상 시는 짧은 것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꼭 맞는 통념인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시집 제목인 ‘거룩한 줄넘기’에 대한 시인의 설명에서 이 독특한 시를 이해하는 힌트를 얻어도 좋을 것이다.

“비천하고 세속적인 일상과 고귀하고 존엄한 것 사이를 오가는 것. 그 과정 자체가 다름 아닌 ‘거룩함’이고 ‘거룩한 줄넘기’이겠지요.”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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