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미지에 홀려 ‘잠자는 경이’를 벗기다

  • 입력 2008년 3월 8일 02시 51분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C W 쎄람 지음·강미경 옮김/392쪽·2만3000원·랜덤하우스코리아

고고학은 고대 세계의 비밀을 벗겨내는 학문이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고고학자들의 우스갯소리처럼, 신비롭지 않고 오히려 지루한 ‘땅 파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존재를 알린 유적은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일 때도 많다.

하지만 지난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국보급 백제 사리장엄구가 140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고고학 덕분이다. 백제인의 미감을 보여준 백제금동대향로가 1993년에 발굴된 것도, 아름다운 신라 금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고고학 덕분이다. 고고학은 이처럼 어둠 속의 고대 세계에 빛을 주고 상상을 현실로 재창조하는 매력적인 학문이다.

한국의 고고학 역사는 짧다. 1960년대 이후에야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그 전에는 과거 유적과 유물을 탐구한 노력을 찾기 힘들다. 반면 서양에서는 19세기에 이미 주류 과학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역동적 이미지였다.

이 책이 선보이는 폼페이, 트로이, 페르세폴리스,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크레타, 그리스, 로마 등 고고학 발굴로 드러난 고대 세계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신문기자, 출판인으로 활동하며 고고학 유적 발굴에 참여한 독일 출신 저자의 방대한 고고학 지식과 경험이 고스란히 담겼다. 명예와 보물, 학문적 사명감을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모험, 시행착오, 희열의 세계가 차례로 펼쳐진다.

1485년 로마 아피아가도에서 석관이 발굴됐다. 아주 잘 보존된 매력적인 여성 미라는 고대 세계에 대한 당대인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그로부터 정통 고고학이 시작된다.

18세기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 유적은 말 그대로 기적이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재앙이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풍요로운 도시를 덮쳤다. 이 도시는 두께가 15m나 되는 용암층에 뒤덮였다. 이 비극은 1700여 년 뒤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폐허’가 됐다. 돌처럼 굳은 화산재 덕분에 죽을 당시 모습 그대로인 유골, 술집, 체육관, 포도주를 담았던 단지, 벽의 낙서, 광고, 벽화까지 시간이 정지된 듯한 모습이었다.

호메로스의 영웅서사시 ‘일리아드’를 겨드랑이에 끼고 트로이 발견의 꿈을 꿨던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어둠에 휩싸인 위대한 그리스 민족의 흥미로운 고대 역사 일부를 발견함으로써 과학을 풍성하게 만들겠다”는 꿈을 이뤘다.

놀라운 발굴 이야기 사이로 복원에 대한 딜레마도 읽을 수 있다. 고대 크레타 문명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유물인 ‘뱀의 여신’. 큼지막하고 표정이 풍부한 눈에 화려한 의상을 입고 젖가슴을 드러낸 이 유물은 사실 발굴 당시 얼굴 전체와 두 팔, 몸통 대부분이 없었다. 다 새로 만든 것이다. “사기성이 농후한 복원이나 복구에 의한 기념물의 왜곡은 일부러 가짜 기념물을 만들어내는 위조와 다를 바 없다”는 한 고고학자의 지적을 되새기게 한다.

스핑크스의 몸통이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이나, 고대 페르시아 문명의 영광을 간직한 페르세폴리스 유적에서 발견된 설형문자를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해독해내는 과정 등 흥미로운 발굴 관련 뒷이야기도 많다.

영국의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는 “박물관의 유리 상자에 들어 있는 유물을 구경하는 사람 가운데 그것을 발굴해 옮기기까지 얼마나 큰 희생이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책이 그 희생과 도전의 과정을 확인하게 해준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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