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속의 별]‘클래지콰이’ 호란의 우상 만화가 허영만

  • 입력 2007년 4월 28일 04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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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서 만난 가수 호란 씨(왼쪽)와 만화가 허영만 화백. 허 화백의 만화를 소재로 이야기꽃을 피운 두 사람은 인터뷰 예정 시간인 두 시간을 넘겼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훈구  기자
2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서 만난 가수 호란 씨(왼쪽)와 만화가 허영만 화백. 허 화백의 만화를 소재로 이야기꽃을 피운 두 사람은 인터뷰 예정 시간인 두 시간을 넘겼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훈구 기자
‘슈퍼보드’
‘슈퍼보드’
‘사랑해’
‘사랑해’
‘타짜’
《어린아이들은 누구나 만화를 좋아한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도,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도, 밖에서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 중에도 만화를 마다할 아이는 없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만화책을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매달 만화잡지를 사다 나를 수 있었다.

보물섬, 만화왕국, 소년중앙은 기본이고 하이센스에 르네상스 정도는 보고 나서야 한 달이 정리가 되었다.

김수정 이상무 이진주 김동화 황미나 강경옥….

가슴 두근거리는 이름들도 많았고, 캐릭터들은 페이지가 뜨끈할 정도로 생생했으며, 그들이 만들어 내는 만화들은 입맛 따라, 잡지 따라 색깔도 천차만별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미스터 손’으로 허영만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이후 ‘날아라 슈퍼보드’라는 제목으로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면서 미스터 손, 사오정, 저팔계는 아이들의 인기 스타가 되었다. 다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싶어 했고, ‘∼∼하셩’ 체를 구사했으며, 말귀가 어두운 아이에겐 사오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정말이지 그 당시 슈퍼보드는 아이들의 바이블이었다.

두 번째 만남도 시기가 얄궂다. 영화 ‘비트’가 개봉했던 1997년, 나는 극중 민이나 로미와 동갑인 열아홉 살이었다. 한참 뛰놀던 초등학교 시절엔 ‘슈퍼보드’가 대히트를 하더니, 방황하는 사춘기의 절정엔 ‘비트’가 온통 휩쓸었다. 함께 휘청거리던 나는 ‘비트’를 몇 번이나 읽으며 거푸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경험하지 못한 가공의 불행에 끝없이 공감하면서.

유년기와 사춘기, 두 번의 파란으로 내게 다가왔던 ‘만화가 허영만’을 20대인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 티를 내고 싶던 20대 초반, 다른 친구들보다 나를 더 ‘있어’ 보이게 한 것은 전공서가 아니라 만화 ‘사랑해’였다. 철수가 구사하는 대사 하나하나, 인용문 하나하나는 그대로 머릿속에 착착 정리되어 선배 노릇, 언니 노릇하는 데 이용되었다.

요즘 재미있게 읽는 작품은 ‘식객’이다. 식객을 볼 때는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그러지 않으면 살찌기 십상이다. ‘식객’에 나오는 제주도 순대가 탐이 나 일부러 찾아 먹기도 했다.

‘사랑해’로 나의 20대 초반을 설레게 하고, 최근엔 영화로까지 개봉된 ‘타짜’로 다시 한 번 아웃사이더에의 동경을 품게 한 허영만 선생님을 실제로 만날 기회가 생겼을 때, 무슨 이야기를 전해야 할지 정리할 수 없어 또 밤을 새웠다.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며 30년을 살아온 선생님께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어떤 작품을 읽었다며 목록이나 늘어놓아야 하는 걸까. ‘팬이에요, 만화 너무 재밌어요’ 등의 공허한 말 따위?

막상 서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 고민이 쓸데없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리석은 선입관에 내가 사로잡혀 있었을 뿐, ‘작가 허영만’의 얼굴에서는 기성세대를 연상시키는 그림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안이한 자기복제나 클리셰(진부한 표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작품처럼, 수십 년의 작품 활동은 그의 얼굴에 어떤 군살도 기름기도 더하지 않은 것이다. 정신이 젊은 사람은 육체도 늙지 않는다는 말을 증명하듯이.

언젠가 보았던 허영만 선생님의 작업실 사진 속 책상에는 이런 메모가 한 장 붙어 있었다. ‘나보다 못한 사람 없다.’ 그래, 솔직히 내 관점에선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지만, 아직까지도 직접 일일이 취재에 나서고, 느끼고 본 것만을 그리는 작가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좌우명 덕분일 것이다. 신문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은 돼지국밥을 그리고, 비 오는 날 술 한잔 기울이는 할머니의 손 냄새가 느껴지는 장면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이날, 유명세에 의존하지 않는 진정한 표현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몸짓과 말투로 허영만 선생님은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까지 해 온 일이 아닌, 앞으로 하고 싶은 활동에 대해. 나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끝없이 지향하며, 나의 반영과 나 자신을 혼동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호란 가수

■ 2시간 대화후 “10분만 더”

만나기 일주일 전 “호란(본명 최수진·28) 씨가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한다”고 하자, 허영만 화백은 모르는 듯했다. 이름을 되묻기도 했다. “호란 씨요?”

호란 씨는 ‘스위티’ 등 감각적인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20, 30대에게 인기를 누리는 3인조 그룹 ‘클래지콰이’의 멤버이자 교양 프로그램의 단골 패널이지만, 예순의 허 화백에게는 ‘낯선’ 존재였다.

처음에는 호란 씨가 마음속에 새겨 온 만화가 허영만 화백과의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서울 강남구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마치 허 화백이 호란 씨의 팬이 된 것 같았다.

호란 씨는 화려한 녹색 드레스를 입고 귀밑머리를 치렁치렁하게 땋아 내려 향기로운 봄나비를 연상시켰고 이 앞에 ‘캡’ 모자에 회색의 티셔츠를 걸치고 나온 허 화백은 왠지 미안한 표정이었다.

“호란 씨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작업복을 걸치고 나왔네요. 사실 평소 외출복이 이렇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조금 젊었으면 데이트를 신청하겠는데 먼발치에서 ‘사랑’하겠습니다.”

허 화백은 호란 씨가 사인을 받기 위해 들고 온 ‘식객’ 표지 안쪽에 이 같은 장문의 글을 남겼다.

나이 차가 30년이 넘는데도 두 사람은 만화 이야기로 금세 통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슈퍼보드’로 처음 허 화백의 만화를 접했다는 호란 씨는 ‘각시탈’ ‘오! 한강’ ‘타짜’ ‘망치’ ‘미스터 Q’ ‘비트’ ‘세일즈맨’ ‘사랑해’ 등 허 화백의 대표작을 시기별로 줄줄 꿰고 있었다.

“‘사랑해’ 같은 경우는 선생님 만화 중에서는 상당히 이색적인 작품이었는데….”

작품을 줄줄이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마다의 특성을 얘기하며 열렬한 ‘팬’임을 내보이는 호란 씨와 허 화백의 대화는 술술 풀렸다. 이 때문에 허 화백은 2시간여 대화를 마무리하고 일어설 시간이 다 됐는데도 “10분만 더 하자”고 했다.

“이렇게 끝내면 서운하니까 다음에 제대로 술 한번 합시다. 호란 씨, 다음에 꼭 나와 줘요. 기자 양반, 스케줄 맞춰 줄 거죠? 하하.”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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