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씨 “위태롭게 꼬인 채로… 그것이 인생”

  • 입력 2007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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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민 기자
안철민 기자
어떤 운명은 어퍼컷을 주지 않는다. 가벼운 잽만 날린다. 크게 한 방 얻어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겠는데, 운명은 친절한 척 툭툭 치기만 한다.

권여선(42·사진) 씨에게도 그랬다. 장편 ‘푸르른 틈새’로 1996년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단숨에 주목받는 신예가 됐다. ‘공통교양으로서 문학’이 끝물이던 시절에 그 작품은 대학생들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탐독하던 소설 중 하나였다.

권 씨가 10여 년 뒤 새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창비)을 내기까지 운명은 결정적인 한 방을 주지 않았다. 장편으로 등단했지만 단편을 안 쓰면 알아주지 않는 분위기라 단편에 매진했다. 그런데 ‘구박만 받았다’. 시간이 지났고 잊혀졌다. 8년이 지나서야 조용히 첫 단편집을 묶었다. 끊겼던 청탁이 하나둘 들어왔다. ‘괜찮은 작품’이라는 평이 꾸준하게 이어졌다.

‘분홍 리본의 시절’은 그 괜찮은 단편 7편을 모은 것이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불안정하게 생계를 잇는, 견딜 만한 잽만 맞는 것 같은 날들을 지내 오면서도 글 쓰고 싶다는 마음은 떠난 적이 없다. 발 댄 땅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 얘기를 써야지, 늘 다짐했다. 그 마음으로 쓴 작품집에서 작가는 언제든 터져 버릴 것 같은 일상의 불안함을 특유의 신랄한 문체로 묘사한다.

표제작은 대학선배 부부를 만나면서 중산층의 위선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몸 관리하는 척 육류를 즐기지 않는다면서도 고기 요리를 볼 때마다 엄청나게 먹어 대는 부부, 안정된 부부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부하 직원과 불륜 행각을 벌이는 선배….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화자의 가슴속 외침으로 소설은 맺어진다.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다가 남자친구가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분노를 폭발하는 로라(‘가을이 오면’), 노교수 부자(父子)의 긴장 관계를 견디다 못해 뛰쳐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윤 양(‘약콩이 끓는 동안’) 등 소설 속의 삶은 살얼음판같이 위태롭다.

“전에는 ‘필(feel)을 받아야만’ 써졌는데 이제 조금씩 머릿속에서 인물이 만들어진다. 작가가 돼 가는 것 같다.” 운명에 단련된 듯 권 씨는 겸손하게, 그러나 힘 있게 “오래오래 소설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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