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멜로는 다 어디로 갔을까

  • 입력 2007년 1월 25일 11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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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멜로가 다 어디 갔을까.

지난 한해 영화나 드라마에서 멜로영화가 연전연패한 반면 코믹과 액션, 사극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에서 흥행에 성공한 멜로영화는 송해성 감독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한 편 정도다. 전지현 정우성 이성재 주연의 호화캐스팅을 자랑했던 '데이지'를 필두로, 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던 차승원 주연의 '국경의 남쪽', 최강 멜로 커플 이병헌·수애 주연의 '그해 여름', '국민여동생'이라고 불린 문근영 주연의 '사랑 따위는 필요 없어', '연애하고 싶은 남자'로 알려진 유지태 주연의 '가을로' 등이 모두 참패했다.

이런 상황은 비단 지난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2000년대 이후 흥행 랭킹 20위에 드는 영화 중에서 멜로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멜로영화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격세지감을 느낄 만 하다.

눈을 돌려 TV드라마를 보자. 지상파 방송사들이 지난 가을·겨울 시즌 야심 차게 내놓은 멜로드라마 3편이 모두 한자리 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SBS '눈꽃'(9.2%), KBS '눈의 여왕'(8%), MBC '90일, 사랑할 시간'(4.8%)으로 이어진 이례적 '참사'였다. 이런 멜로의 약세는 장기 시청률 추이에서도 확인된다. AGB닐슨미디어리서치가 조사한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역대 시청률 10위 안에 든 드라마 중 '첫사랑' '젊은이의 양지' '아들과 딸' 등 90년대 드라마 7편의 대다수가 멜로였다면 2000년대 이후 작품인 '허준', '태조 왕건', '대장금'은 모두 사극이다. 또 2000년대 드라마만 놓고 봤을 때 시청률 10위의 드라마 중에 사극과 로맨틱 코미디 등 비(非)멜로 드라마가 7편을 차지한 반면 멜로는 3편으로 줄어든다.

●대중문화의 원형으로서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그리스어의 멜로스(노래)와 드라마(극)가 결합된 용어.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주요인물의 등장·퇴장 때 극적효과를 높이기 위해 대사를 끊고 음악을 연주한 것을 지칭한 용어였다. 이는 근대에 들어와 장 자크 루소가 '피그말리온'에서 대사와 대사 사이에 음악을 넣으며 차용한 뒤 곧 배우의 감정에 맞춰 음악반주를 적극 사용하는 연극형식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의 원조인 셈이다.

이런 단순한 연극형식이 장르로 발전한 것은 18세기 후반 부르주아 계급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르주아들은 엄격한 형식을 강조하는 귀족 취향의 고전주의 예술에 대한 일종의 대항마로 좀더 자유롭고 오락성이 강한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차용해 자신들의 욕구를 담아냈다.

이에 따라 멜로드라마는 줄거리의 변화는 다양하되 처음에는 사랑이 있고 다음에는 불행과 고난, 마지막에는 사랑의 승리로 귀결되는 통속적 공식의 장르로 발전했다. 이것이 음악의 유무에 관계없이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오락본위의 연극·영화·방송극을 지칭하게 됐다. 다시 말해 멜로드라마에는 오늘날 대중문화의 원형이 숨쉬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멜로드라마는 분화한다. 통속적 애정극 또는 신파극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산업화시대의 변화 속에서 중산층 내부의 허위의식과 도덕적 딜레마를 포착한 비극적 예술형식으로 새롭게 각광받기도 한다. 전자는 TV 아침드라마에서 쉽게 발견되고 후자는 '봄날은 간다'와 '해변의 여인' 같은 허진호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서 찾을 수 있다.

●문화산업적 관점에서 멜로의 퇴조가 의미하는 것

이런 멜로드라마가 한국사회에서 퇴조하는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3가지로 나뉜다. 문화산업적 공급논리에서 바라보는 시각, 문화향유자의 소비행태변화에서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사회구조적 변화의 반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다.

문화산업적 공급논리에서 멜로의 퇴조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한류 등을 통해 영화나 드라마의 시장규모가 커지면서 관객동원의 한계를 지닌 멜로장르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할리우드처럼 블록버스터급 영화는 대부분 액션과 SF와 같은 스펙터클을 강조하는 영화들이고,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는 그 뒤를 받쳐주는 중급 라인의 영화로 역할이 제한된다는 설명이다. TV드라마도 대형제작비가 투입되는 스펙터클 위주의 드라마가 주력상품이 되면서 멜로드라마는 그들 상품의 양념이나 감초로서 역할이 제한되고 있다.

김미현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팀장은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으로 문화산업의 작동논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동시에 영상·게임·드라마보다는 스펙터클을 선호하는 소비 트렌드의 산물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문화소비자들의 성향변화도 뚜렷하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03~2005년도 관객성향조사에서 애정/멜로 장르는 코미디, 액션에 밀려 계속 3위에 머물렀다. 2006년 조사에선 코미디(21.7%), 액션(18.4%), 로맨틱 코미디(12.9%), 애정·멜로(12.5%) 순으로 다시 한 계단 내려간 것으로 조사됐다.

영화계에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의 위기의식 확산과 더불어 중산층문화의 산물인 멜로드라마가 장르적 한계에 이르렀다는 분석과 대중문화의 오락화에 맞물려 집중적 감정몰입이 필요한 멜로드라마를 회피하려는 대중심리의 반영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영화평론가 강유정 씨는 "멜로의 고정된 이야기구조에 대한 권태감, 갈수록 스펙터클을 강조하는 영상문법의 속성, 너무 빨리 변화하는 현실의 중압감으로 인해 대중문화와 유희와 오락만 찾는 대중심리가 결합하면서 멜로가 외면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디지털문명과 포스트잇시대가 가져온 멜로의 몰락

멜로의 몰락을 사회구조의 변화를 반영하는 시대적 징후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시가 읽히지 않고, 소설이 외면되는 문화가 낭만과 감수성의 상실을 낳았고 감정적 몰입이 필요한 멜로의 몰락을 낳았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을 통해 세계와 인간을 배우던 문화는 1980년대를 관통하며 점차 빛바랜 사진이 됐다. 1980년대 386세대는 소설을 집어던지고 사회과학 책에 탐닉했고, 포스트 386세대는 동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서 대표적 작가를 갖지 못한 첫 세대로 규정된다. 최근 10대, 20대들의 청년기 입문서는 아예 처세술과 자기계발서 위주로 좁혀지고 있다. 이는 순수문학작품을 모아서 펴낸 이상문학전집 같은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던 90년대 초반의 풍경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원룸과 휴대전화로 상징되는 철저한 개인주의 문화가 확산되고 입시와 취업문제로 시 한줄 읽을 틈이 없는 낭만상실의 시대에 멜로가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고장 나면 수리해서 다시 쓰는 아날로그 문명이 급속히 퇴조하고 고장 나면 바로 버리고 새 것으로 갈아 끼우는 디지털 문명이 가장 융성하는 한국사회의 구조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박문호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아날로그문화는 헤어짐에 익숙하지 않은 '차마 그럴 수 없다'의 정서에 지배받는 반면 디지털문화는 언제 어디서나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포스트잇'의 정서"라며 "멜로드라마의 퇴조는 바로 그런 인간관계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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