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너, 아메리카여… 오만하지만 경이롭구나!

  • 입력 2007년 1월 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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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칸 버티고/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김병욱 옮김/477쪽·1만6500원·황금부엉이

“자신의 위기와 운명에 대해 이토록 근심스럽게 파고드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토록 자신의 정체성에 현기증(버티고·Vertigo)을 느끼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의 악동으로 불리는 저널리스트이자 철학가, 소설가이며 영화감독이기도 한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300여 일간 미국 곳곳을 누비며 포착한 미국의 모습이다.

그의 미국 순례는 ‘미국의 민주주의’란 저술을 통해 미국이 ‘서구의 미래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예찬한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 토크빌은 교도소 제도 개혁을 위한 시찰을 명분으로 절친한 친구 귀스타브 보몽과 함께 1831년 5월∼1832년 3월 독립한 지 반세기밖에 안 된 신생국을 순례한 뒤 유례없는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는 순결한 미국인의 모습에서 그 시스템의 세계 확산을 확신했다.

미국의 시사잡지 ‘월간 애틀랜틱’은 2005년 토크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1세기 토크빌’로서 레비를 선택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 납치돼 살해된 월스트리트저널의 데이비드 펄 기자의 구명운동을 펼친 동시에 아랍 포로에 대한 잔혹 행위로 악명을 떨친 아부그라이브 사태를 맹렬하게 비판한 양심적 지식인이란 생각에서일까.

현실 참여(앙가주망)를 강조하는 프랑스 지성의 적통임을 자부해 온 레비는 영미권에선 일급일지 몰라도 프랑스에선 이류로 취급받아 왔던 토크빌의 역할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엔 둔감하면서 맹목적 반미주의엔 민감했던 자국 지식인들의 냉소적 태도에 대한 야유인 동시에 9·11테러 이후 정신분열적 행태를 보이는 세계 유일 강대국의 실체를 맨몸으로 부닥쳐 보고 싶다는 투지의 산물이었다.

그렇게 그는 대통령선거전이 한창이던 2004년 가을부터 300여 일간 주로 자동차에 몸을 싣고 미 대륙을 횡단 또는 종단하며 40여 개 도시를 돌아다녔다. 비트 세대의 미국 작가인 잭 케루악이 소설 ‘길 위에서’에서 담아낸 ‘아스팔트 위의 나른한 각성’을 통해 미국의 초상을 그려내겠다는 야심을 품고.

그는 그렇게 버펄로,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에서 대도시의 죽음을 목도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선 탈(脫)역사화한 반(反)도시를 읽어낸다. 시애틀에선 미래의 미국을 만드는 탈미국화한 도시와 사랑에 빠지고 뉴올리언스에선 이민의 제국인 미국이 되레 ‘영혼의 혼혈성’은 결여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흥분한다. 야구 ‘명예의 전당’이 있는 쿠퍼스타운에선 가짜와 복제품마저 기념품으로 둔갑시키는 역사 콤플렉스를 읽고 라스베이거스의 스트립바에선 ‘정숙한 색욕’이라 부를 도착증에 아연실색한다. 시카고에선 은행처럼 냉기가 도는 대형교회에서 세속화한 신을 만나고, 미니애폴리스의 대형쇼핑몰에선 ‘영원한 유년’에 대한 강박증의 공포를 체험한다.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의 ‘큰 바위 얼굴’들이 새겨진 러슈모어 산에서 인디언과 흑인이라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정, 토크빌이 부드러운 전제주의라고 말했던 대중정치의 함정을 찾아낸다.

그는 같은 히스패닉을 사냥하는 멕시코 국경수비대원, 제국의 무자비한 무기라고 하기엔 너무도 순진한 사관생도, 반유대주의를 신봉하는 인디언 운동가, 유대인을 벤치마킹하는 아랍인, 자유로운 방치보다는 관심 어린 부자유를 갈망하는 죄수와 같은 평범한 미국인의 역설적 상황을 포착한다. 그는 또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선 영원한 문제아에서 갑작스럽게 ‘가문의 영광’이 된 아이의 복수심을, 남편이 바람을 피운 현장(백악관)으로 돌아가려는 힐러리 클린턴에게선 치욕에 대한 원한의 심리를 읽어낸다. 히스패닉 대 앵글로색슨의 대결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새뮤얼 헌팅턴의 인종주의에 대한 무감각에 절망하지만 혼혈인데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버락 오바머 상원의원에게서 미국 정치의 희망을 발견한다.

결론적으로 레비는 미국이 기념 메커니즘의 범람, 사회 시스템의 비만, 정치·사회적 집단 간의 분열, 극단적 빈곤 영역의 팽창이라는 4가지 합병증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위기로 바라볼 뿐 명백한 몰락의 징후로는 해석하지 않는다. 미국은 처음부터 실체가 없는 이념으로 이뤄진, 그래서 텅 빈 ‘추상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다(多)와 일(一), 이질성과 동질성, 민족과 시민, 민주와 공화라는 변증법을 일상적 국민투표로 이뤄낸 나라가 곧 미국이기 때문이다. 레비는 다만 실용주의의 나라인 미국이 일찍이 늙은 유럽의 질병으로 진단했던 이데올로기의 질곡에 뒤늦게 빠져 날 새는 줄 모르는 것에 질겁하며 이런 충고를 남겼다. ‘친구들이여, 이제 당신들 차례다. 당신들의 건강을 빈다!’ 원제 ‘American Vertigo’(2006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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