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버린 세상… 변하지 않는 추억… ‘오래된 정원’

  • 입력 2007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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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MBC 프로덕션
사진 제공 MBC 프로덕션
이별의 날, 여자는 “밥 먹고 가라”며 상을 차린다. 남자와 여자는 말없이 열무김치를 우적우적 요란하게 소리 내며 씹어 먹는다. 불이 꺼진 방 안, 열무김치 씹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비가 오는데 남자는 떠나고 버스를 바라보던 여자는 말한다. “숨겨 줘, 재워 줘, 먹여 줘, 몸 줘…. 왜 가니, 니가?”

4일 개봉하는 영화 ‘오래된 정원’의 한 장면. ‘신나게 사랑하는 것이 미안했던 시대’에 사랑했던 연인은 이렇게 냉정한 척, 뜨거운 마음을 숨기고 헤어진다. 황석영 씨의 동명 소설을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의 임상수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시종일관, ‘쿨’한 척, ‘핫’하다.

시국사범으로 16년 8개월 복역을 마친 오현우(지진희)가 석방됐다. 한윤희(염정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도피 시절 자신을 숨겨 준 윤희와 6개월 사랑의 추억이 있는 갈뫼로 향한다. 그곳에서 윤희가 남긴 글들을 읽는 그의 현재와 과거가 계속 교차된다.

감정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교차되는 장면과 뭉텅 잘려 나간 듯한 이야기가 원작의 독자에겐 실망스러울 수 있다. 멜로 영화인데 둘의 사랑이 너무 급작스럽게 시작되고, 충분치 않게 표현돼 관객이 몰입하기 힘든 것도 아쉽다.

그러나 임상수는 원작을 자기 방식대로 각색했다. 시대를 완전히 외면하지도, 개인의 가치를 버리지도 않는 인물인 윤희는 원작보다 더 큰 비중으로, 더 풍부한 느낌의 캐릭터로 나온다. 1980년대 운동권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생경한 용어를 외쳐대는 학생들의 입만 연속적으로 보여 주거나 그들 내부의 부조리를 보여 주기도 한다. 윤희는 후배로 나오는 대학생 영작의 미래에 대해 갑자기 관객들을 보며 “쟨 요새 날리는 인권변호사래요. 다음에 선거에도 나간대요”라고 말한다. 1980년대에 대통령을 “죽여야지” 했던 학생은 현재의 지배계급이 되는 것.

세상은 달라졌다. 그래서 “저는 사회주의잡니다” “우리가 유물론자다” 하는 말들은 오히려 유머로 다가온다. 출소한 현우가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번 어머니가 사 준 1000만 원이 넘는 옷을 입는 아이러니도 우습다.

황석영 씨는 책 후기에서 ‘오래된 정원’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이라고 했다. 현우는 신념을 위해 사랑도 버렸지만, 신념은 아무것도 아닌 시대에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온다. 혼란스러울 그에게, 영화의 결말은 희망과 화해를 넌지시 밀어 넣는다. 현우의 말처럼 ‘자기만 행복하면 왠지 나쁜 놈이 되는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쳤던 세대에게, 이 영화는 ‘쿨’한 척하면서 ‘핫’하게 묻는다.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 그리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12세 이상.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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