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함께 문화산책]소설가와 라디오

  • 입력 2006년 12월 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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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란 ‘현세의 규칙 너머에 존재하는’ 물체인 것이다. 규칙을 무시할 수 있고 시간을 넘나들 수 있고 공간을 건너뛸 수 있는 것이 바로 라디오다.”(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에서)


소설가들은 라디오를 많이 듣는다. 홀로 쓰는 작업이니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건 오히려 번잡스럽다. TV는 당연히 안 되고, 음반도 한 바퀴 돌면 갈아줘야 하니 번거롭다. 라디오, 그것도 진행자의 말이 주가 아니라 곁들여지는 정도의 프로그램이라야 한다. 쓰기에 집중할 때는 짧은 멘트마저도 정신을 흩뜨린다. 그래서 작가들에게 인기 있는 채널은 FM93.1(클래식 음악 방송)이다. “얼마나 들었는지 국악까지 좋아지더라”고 소설가 김중혁(36) 씨는 말한다.

김중혁 씨가 올해 낸 단편소설집 ‘펭귄뉴스’(문학과지성사)에는 라디오 얘기를 쓴 단편 ‘무용지물 박물관’이 실려 있다. 라디오PD에게서 라디오 케이스를 디자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 화자의 이야기다. 소설 중 라디오에 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나온다.

1930년대 오선 웰스가 H G 웰스의 소설 ‘세계 전쟁’을 드라마로 각색해 방송한 적이 있었다. 화성인이 몰려와 지구를 공격하는 내용이 라디오 전파를 탔는데,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대국민 방송이 나오자 수천 명의 사람이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작가 김 씨는 “라디오가 아닌 TV로 방송되었다면, 화성인 분장을 한 누군가가 화면에 등장한 것을 보고 모두 키득거리며 재미있게 쇼를 지켜봤을 것”이라고 설명을 보탠다.

한 가지 감각만을 쓰는 것은 의외로 힘든 일이다. 귀를 기울여 라디오를 듣거나, 혹은 라디오 얘기를 쓴 이런 책을 읽거나. 술술 들리면(읽히면) 밤새는 줄 모르지만, 묵직한 뭔가가 있는 듯한데 쉽게 들리지(읽히지) 않으면 끄고(덮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한다.

물론 괴로움은 값을 한다. 똑같이 화성인 침공을 다뤄도 “저건 쇼야’라면서 웃는 대신 ‘전쟁일지도 몰라’라는 상상력을 주는 것. 지난달 새 단장해 나온 구효서(47) 씨의 자전적 장편 ‘라디오 라디오’(해냄)와도 닿는 얘기다. 1960년대 휴전선 마을 사람들은 두부 한 모만 한 라디오를 통해 유행가 ‘동백아가씨’를, 장군과 여염집 규수가 사랑하는 드라마 ‘삼현육각’을 들으면서 울고 웃었다.

‘온 동네 여자들은 그 낭자의 처지가 꼭 자기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버스도 안 다니는 촌구석에 살면서도 어느 날 스피커 속의 장군과 같은 양반이 불쑥 나타나 혼인을 하자고 졸라대는 꿈을 그녀들은 실제로 꿀 겁니다, 아마.’

라디오를 들으면서 온갖 꿈을 키우던 그 소년은 자라서 소설가가 됐다. 많은 이들이 운전할 때만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라디오, 오늘 한번 귀 기울여 들어보면 어떨까. 옆에는 책 두 권을 놓고. 라디오를 듣다 보면 책을 읽고 싶어지고, 책을 읽다 보면 라디오가 듣고 싶어질 것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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