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8년 라벨의 ‘볼레로’ 초연

  • 입력 2006년 11월 22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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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한 술집. 많은 남자가 볼레로 춤을 추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다. 춤은 점차 고조돼 절정에 이르고, 남자들은 손뼉을 치면서 발로 장단을 맞춘다. 남자들은 흥분한 나머지 단도를 빼 들고 난투까지 벌인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주연의 영화 ‘백야’에 삽입됐던 라벨(1875∼1937)의 명곡 ‘볼레로’를 기억하는가. 이국풍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작은 북소리가 반복되면서 가슴을 뛰게 만드는 곡이다.

‘볼레로’는 1780년경 무용가 돈 세바스찬 세레소가 고안한 스페인 무곡. 삼박자로 된 곡으로 현악기와 캐스터네츠의 반주로 연애 감정이 떠오르게 하는 몸짓을 담은 춤이다.

라벨은 전위적인 무용가였던 이다 루빈시테인(1880∼1960)의 부탁으로 1928년 새로운 ‘볼레로’를 작곡했다. 그해 여름. 라벨은 프랑스 서남부 휴양지인 생장드뤼즈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이 곡의 주제 가락을 연주하면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어떤 끈질긴 호소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를 전개하지 않고 관현악을 조금씩 크게 하는 것만으로 몇 차례 되풀이해 볼 작정입니다.”

‘볼레로’는 1928년 11월 22일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루빈시테인 무용단이 초연해 성공을 거뒀고, 이후 세계를 휩쓸었다. 이 곡은 단순한 선율의 반복으로 의식적(儀式的)인 효과를 거둔다. 두 마디로 된 주제가 169번이나 반복되지만 청중은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주제가 반복될 때마다 참여 악기가 점점 늘어나면서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이렇듯 정교하고 개성이 넘치는 라벨의 관현악법에 대해 ‘스위스 시계기사’란 별칭을 붙여 주었다. 라벨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다프니스와 클로에’ 등 뛰어난 오케스트라 곡을 많이 남겼다.

이 중 ‘볼레로’는 그의 마지막 오케스트라 곡이었다. 그는 1932년 가을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그때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비극적인 만년을 보냈다. 머릿속에서는 음악이 울리고 있었으나 오선지에 옮길 수 없었던 그는 결국 폐인이 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연주 시간 약 15분에 이르는 라벨의 ‘볼레로’는 인간이 만든 ‘사랑에 관한 최고의 음악’으로 평가받는다. 부드럽게 시작해 점차 팽팽하게 긴장도를 높여 나가다가 마침내 터져 버리고 이완되는….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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