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거울로 비추듯…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인터뷰

  • 입력 2006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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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의 모차르트 해석가로 추앙받고 있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씨가 들려주는 ‘레퀴엠’은 과연 어떨까. 그가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을 이끌고 첫 내한 공연을 펼친다. 사진 제공 한양대 음악연구소
현존하는 최고의 모차르트 해석가로 추앙받고 있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씨가 들려주는 ‘레퀴엠’은 과연 어떨까. 그가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을 이끌고 첫 내한 공연을 펼친다. 사진 제공 한양대 음악연구소
올해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공식 기념식에서 아르농쿠르 씨가 빈 필을 지휘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한양대 음악연구소
올해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공식 기념식에서 아르농쿠르 씨가 빈 필을 지휘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한양대 음악연구소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의 해에 아르농쿠르가 일본에서 9개 도시를 돌며 총 15회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강해근 한양대 교수)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78·사진) 씨. 그는 올해 ‘모차르트의 해’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1월 27일(모차르트 생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공식 기념식은 그의 연주(빈 필)와 기념연설로 시작됐고, 12월 5일(모차르트 기일)에 잘츠부르크에서 ‘레퀴엠’을 연주하면서 대장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1953년 고(古)음악을 연구하는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을 창설한 그는 ‘당대연주’(작곡된 시대의 악기와 연주방식으로 연주하는 것)의 선구자로서, 서양음악 연주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그는 몬테 베르디의 음악을 현대에 되살려냈고, 바흐 르네상스를 주도했으며, 모차르트 해석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아르농쿠르 씨는 올해를 끝으로 연주를 대폭 줄이겠다는 부분 은퇴선언을 했다. 25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그는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과 쇤베르크 합창단을 이끌고 모차르트 ‘레퀴엠’, ‘주일의 저녁기도’를 공연한다. 아르농쿠르 씨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내한공연을 성사시킨 사람은 한양대 음악연구소의 강해근 교수. 아들 프란츠 아르농쿠르(아버지의 주치의로 동행) 씨를 통해 우여곡절 끝에 공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공연을 앞두고 강 교수와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씨가 e메일로 대담을 나눴다.

● 방치된 ‘오리지널 악기’ 명기로 복원

―모차르트는 8세 때 첫 교향곡을 썼다. 70대 중반의 당신이 그의 청년기 교향곡에 크게 관심을 두는 이유는 뭔가. 그 안에서 한 천재의 발전과정을 보았는가.

“모차르트는 8세였을 때가 없었다. 이런 천재는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천재인 것이다. 그는 하늘이 완성시켜 이 땅에 내려 보냈다. 나는 이미 20년 전부터 모차르트의 청년기 교향곡들에 관심을 쏟고 있다.”

―‘모차르트 행복감’이란 말이 있듯이 모차르트의 음악은 항상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당신의 모차르트 연주는 때로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다.

“나는 모차르트가 그의 음악 안으로 쏟아 부은 것을 드러내 보여 주고 싶다. 저 심연의 삶부터 천국의 삶까지 말이다. 내가 젊은 시절 ‘g단조 교향곡’을 연주했을 때, 사람들은 웃었고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음악에 담긴 빛과 그림자, 행과 불행, 아름다움과 추함 등 한없이 깊게 거울로 비추듯 보여 주고 싶었다.”

―모차르트는 비속어 투성이의 ‘베즐레 편지’(사촌 여동생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남기기도 했고, 레퀴엠과 ‘아베 베룸 코르푸스’와 같은 성스러운 종교음악도 작곡했다. 그의 인간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모차르트는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다른 예술가들과는 전혀 다른 예술가였다. ‘베즐레 편지’와 같은 것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썼었다. 이것은 별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베 베룸 코르푸스’는 단 한 사람만 쓸 수 있었다. 그는 결정적인 것을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음악가였다.”

―50여년 전 당신의 첫 음반엔 ‘오리지널 악기’가 사용됐다. 그 악기들은 어떻게 수집했는가.

“당시에는 교회의 오르간 뒤편 구석에 오리지널 현악기들이 방치돼 있기도 했다. 그리고 장작더미 옆에 분해된 콘트라베이스도 있었다. 나의 감바 역시 산산 조각난 채 난로의 땔감 옆에 있었다. 그것들이 악기로 복원돼 지금은 훌륭한 소리를 내고 있다.”

―은퇴하기엔 너무 빠르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나는 나의 소명을 거의 완수했다고 생각한다. 내 나이가 이제 서서히 연주를 줄여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6만∼30만 원. 02-2220-1512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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