듬직한 제자“차도서 좌선” 뿌듯한 스승“일류무대 서야 진짜”

  • 입력 2006년 9월 2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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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김선욱 군(왼쪽)은 귀국 다음 날인 27일 서울 백석아트홀에서 녹음 작업 중이던 스승 김대진 교수를 찾았다. 김 교수는 “콩쿠르는 상대평가지만 무대 연주는 절대평가”라며 “앞으로 더욱 길고도 먼 길을 가야 한다”고 제자에게 조언했다. 김재명  기자
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김선욱 군(왼쪽)은 귀국 다음 날인 27일 서울 백석아트홀에서 녹음 작업 중이던 스승 김대진 교수를 찾았다. 김 교수는 “콩쿠르는 상대평가지만 무대 연주는 절대평가”라며 “앞으로 더욱 길고도 먼 길을 가야 한다”고 제자에게 조언했다. 김재명 기자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금의환향하겠다더니…. 약속을 지켰구나.”

27일 오후 6시 서울 서초구 방배동 백석아트홀. 후배 피아니스트의 녹음 프로듀싱 작업을 지휘하던 김대진(44)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에게 반가운 제자가 찾아왔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김선욱(18) 군이었다.

전날 귀국한 김 군은 “시차적응이 안 돼 밤새 한 숨도 못잤다”며 벌건 눈을 하고서도 이날 등교해 3학년 수업을 들었다. 김 군이 “오랜만에 수업에 들어갔더니 울렁거린다”고 어리광을 부리자 김 교수는 “야 임마, 술 담배 좀 그만 해. 피아니스트는 손 떨리면 끝이야!”하며 핀잔을 준다.

18세의 나이에 세계적 권위의 콩쿠르에서 우승한 제자에게 칭찬 한 마디 건네도 되건만 “나는 좋다기보다 걱정이 앞선다”며 김 교수는 금방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콩쿠르를 통해 주어지는 무대에서 인정받아야 진짜 일류가 되는 거야. 그 무대에서 세계적인 매니지먼트, 교향악단, 지휘자로부터 픽업돼야 해. 콩쿠르는 상대평가지만 무대는 절대평가지. 실력뿐 아니라 무대 매너도 좋아야 하고, 얼굴도 잘 생겨야 하고, 상품가치도 있어야 하고…. 콩쿠르 1등하는 것보다 100배는 더 어려운 관문이지.”

김 군은 1999년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김 교수를 사사해 왔다. 지난해 쇼팽콩쿠르 결선에 진출했던 임동민 임동혁 형제, 손열음, 첼리스트 고봉인 씨 등도 예비학교 출신이다.

“선생님은 제 음악적 해석을 100% 존중해 주셨어요. 음악뿐 아니라 제 고민도 많이 들어 주셨고요. 심지어 외국에 나가서 상류층 인사를 만나러 갈 때 테이블 매너부터 영어까지 조언해 주셨지요.”

부모가 맞벌이 교사인 김 군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서 대한음악사에 가서 악보를 사고, 홀로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오케스트라, 첼로,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적 관심을 보여왔다. 다니엘 바렌보임이나 정명훈 씨처럼 지휘와 피아노 분야에서 모두 세계적인 위치에 올라서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창 피아노에 열중해야 할 시기에 너무도 다양한 관심을 갖고 있는 제자에게 김 교수는 따끔한 충고를 던져줬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4, 5년 전 제가 심하게 야단친 적이 있어요. 확실히 뭐가 될지 인생에 계획을 짜라. 아이작스턴은 맨해튼에서 남북으로 오가는 버스를 열 몇 번씩 타면서 인생에 대해 고민을 했다고 하는데, 너도 계획 좀 짜라고 했지요. 그런데 차를 몰고 집에 가는 예술의전당 앞 지하차도 위에 뭔가 동상 같은 게 보이는 거예요. 가까이 가보니 선욱이가 좌선을 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더라고요. 전화해서 ‘너 뭐하니?’ 하니까 ‘앞날을 고민 중’이라고 하더군요.”

김 교수는 올해 초 안식년을 맞아 6개월간 김 군을 미국 뉴욕에 데려갔다. 워낙 친구들이 많고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김 군에게 ‘외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김 교수는 “피아노 실력이 늘기 위해선 자기 성찰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선 외로움이 필수”라고 말했다.

김 군은 “뉴욕에서 혼자 전철을 타고 다니며 앨프리드 브렌델 같은 거장의 연주를 듣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면서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를 찾아낼 때마다 굉장히 뿌듯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독립심이 강한 선욱이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 음악적 아이디어를 찾아가는 ‘음악가 정신’을 갖춘 게 가장 큰 장점”이라며 “지난해 선욱이가 ‘클라라 하스킬’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제게 이제 더이상 다른 선생님은 필요 없습니다’라는 엽서를 받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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