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연애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대가 왔다"

  • 입력 2006년 9월 14일 16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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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출간되는 박민규 씨의 장편소설 '핑퐁'은 부조리한 세상을 뒤엎으려는 왕따 중학생들 얘기다. 이 작품에는 이른바 소설의 흥행코드로 여겨졌던 '러브 스토리'를 찾아볼 수 없다. 남녀 간에 엮이는 관계란 원조교제하는 소녀 얘기가 전부다.

이제 문학 속의 사랑은 끝난 것일까. 문단의 화제가 되는 젊은 작가들은 더 이상 사랑이 전부인 소설을 쓰지 않는다. 2000년대 문학에서 사랑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지 않는다.

●"문학이 연애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대가 왔다"

1990년대는 멜로의 시대였다. 신경숙 씨의 출세작 '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을 사랑하게 된 여자의 눈물과 한숨을, 은희경 씨의 장편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순정적인 사랑이 배신당할까 두려워 방어막을 쳐놓는 여자의 심리를 그렸다. 본격소설 뿐 아니라 김하인의 '국화꽃 향기' 같은 베스트셀러 대중소설도 대부분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 얘기 위주였다.

평론가 김미현 씨는 "드디어 문학이 연애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다. 치열한 사회의식으로 충만했던 80년대에 이어 90년대 소설에서도 다양한 사회 문제가 다뤄지긴 했지만 모두 사랑과 연애를 통해 얘기됐던 데 반해, 최근 문학의 소재는 사랑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등장하지 않거나, 있어도 중요한 사안이 아닌 게 요즘 소설의 흐름이라는 것.

"요즘 작가들은 사랑 말고도 절실하게 할 말이 많은 것 같다"고 평론가 이광호 씨는 말한다. 실제로 박민규(38) 씨는 최신작 '핑퐁'뿐 아니라 '카스테라' '지구영웅전설' 등의 작품을 통해 만화적인 캐릭터를 등장시켜 현실을 비트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문단의 신예 김애란(26) 씨의 첫 작품집 '달려라, 아비'는 아버지 없는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 시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편혜영(34) 씨의 작품집 '아오이 가든'은 구더기, 역병, 송장 같은 엽기적인 이미지를 통해 구역질나는 사회를 상징화했다.

현실과 가족, 사회 등 젊은 작가들의 관심사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에서 연애하는 남녀는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연애는 밥 먹고 이 닦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로 무심하게 묘사된다.

●사람 아닌 것을 사랑하다

연애의 실종과 맞물려 새롭게 등장한 소설 경향은 사람 아닌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 순도 높고 집착에 가까운 사랑은 그대로지만 대상이 바뀌었다. 김중혁(36) 씨는 첫 소설집 '펭귄뉴스'에서 자전거, 라디오, 지도 등 오래된 사물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사랑을 보여준다. 박주영(35) 씨는 '백수생활백서'에서 하루 한 권의 책을 비타민처럼 복용하는 여성의 책에 대한 집요한 사랑을 묘사한다. 모두 인간이 아닌 '대상'에 대한 사랑이다.

문학의 영원한 주제로 알려진 사랑과 연애가 왜 더 이상 작가들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까. 김중혁 씨는 "타인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애가 커진, 개인화한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소설 속에 스며들기도 했겠고, 연애로 담아내기에는 사회가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은 것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가 까발려진 2000년대에 순정적인 연애는 문학 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기획 기피 대상'일 것"이라고 김 씨는 덧붙였다.

평론가 김미현 씨는 "작가들의 관심이 다양해지기도 했겠지만, 90년대에 중요했던 감정의 영역이 소멸되면서 사랑은 환상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이 소설에 투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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