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룡 前문화차관 경질파문]“낙하산 막은게 직무회피냐”

  • 입력 2006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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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이 인사를 알아서 하는 것이고, 나는 내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청와대의 인사 청탁을 거부해 취임 6개월여 만에 경질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는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이 10일 어렵게 입을 열었다.

본보 기자가 이날 오후 유 전 차관의 서울 광진구 구의동 자택을 방문했을 때 유 전 차관은 가족과 여행을 떠나기 위해 막 집을 나서던 참이었다.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초췌한 얼굴의 유 전 차관은 기자의 거듭되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면서 “좀 쉬려고 한다”며 말을 아꼈다.

그는 “내가 말을 안 하려는 것은 그쪽(청와대)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그 사람들에게 잘 보이거나 내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청와대의 거듭된 인사 압력과 자신의 경질에 대한 분노가 짙게 배어 있었다.

유 전 차관은 “만일 나를 파렴치한으로 만들거나 문화부 쪽에 피해가 돌아간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했다.

유 전 차관은 이에 앞서 9일 문화부 직원들에게 e메일로 보낸 이임 인사에서 “드리고 싶은 말이 많지만 조용히 떠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참고 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강호의 패권 싸움을 손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호연지기를 그린 무협지 ‘소오강호(笑傲江湖)’에 빗대어 “참 재미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적었다.

유 전 차관의 경질 이후 문화부에서도 내부 통신망에 몇 건의 글이 오르는 등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한 직원은 ‘우상이 떠나간다’는 제목의 글에서 “유 차관은 항상 외풍을 막아 주고 내부에선 자신 있게 말하도록 도와줬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유 전 차관과 관련한 글들은 10일 모두 삭제된 상태다.

문화부의 일부 공무원은 유 전 차관의 경질이 발표된 8일을 국치일에 빗대어 “부치일(部恥日)”이라고 부를 정도로 분개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인사가 발표됐을 때 몇몇 과장급들이 ‘우리도 사표 내자’고 술렁일 정도였다”면서 “참여정부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접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초 차관급 인사에서 청와대가 장관이 추천한 당시 임병수 차관보 대신 유 정책홍보관리실장을 차관으로 발탁하면서 ‘진보적이고 개혁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며 “6개월 만에 그런 말을 뒤집고 차관을 바꾼 까닭이 낙하산 인사 관련 충돌 말고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했다.

낙하산 인사 파문의 진원지인 아리랑TV의 부사장 직과 관련해 유 전 차관은 본보 기자에게 “청와대가 방송 경력도 전혀 없는 등 지나치게 ‘급’이 안 되는 사람의 인사 청탁을 해서 거절한 것”이라고 밝혔다.

‘결격 인사’로 거론되는 사람은 정치인 출신인 K 씨. 그러나 K 씨는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아리랑TV 부사장 직을 희망한 적도 없고 내 이름이 거론됐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문제가 된 부사장 직은 6월 19일자로 폐지됐다. 문화부 관계자는 “적자가 연간 40억 원에 이르는 등 경영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 전 차관은 한국영상자료원장 공모에서도 청와대와 충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부 주변에서는 낙하산 인사 거부 이외에 김명곤 장관과의 불화가 급작스러운 경질의 이유라는 말도 흘러나오고 있다. 장관이 추진하는 조직 개편을 놓고 의견 충돌이 잦았다는 것.

이날 유 전 차관은 끝내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이날 밤 늦게 그는 “여행을 가려다가 여의치 않은 사정이 발생해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경질 사유로 직무 회피를 든 것과 관련해 그는 “실무자들에게 확인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을 가지고…”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는 “청와대가 인사 청탁을 한 사실이 없다고 말하지 못하고 직무 회피 운운한 것은 인사 청탁을 부인해도 그게 허구라는 게 곧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면서 “내가 보기엔 청와대가 이 건을 갖고 메이저 신문과 마이너 신문끼리 싸움을 붙이려는 의도 같다”고 부연했다.

문화부의 한 관계자도 “기획예산처가 올해 신문유통원 예산을 확정하면서 매칭 펀드 방식으로 정해 예산 수시 배정을 못 하는 문제가 생겼다”면서 “신문유통원이 예산 지원을 받을 만큼 준비가 안 된 상태였을 뿐 차관이 업무를 방기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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