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돌살 20년 연구 집대성한 민속학자 주강현

  • 입력 2006년 6월 1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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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민속학자 주강현 박사는 20년 동안 해마다 평균 책 2권, 논문 10편을 썼다. 그는 “화두를 잡으면 자료 조사와 답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강병기 기자
역사민속학자 주강현 박사는 20년 동안 해마다 평균 책 2권, 논문 10편을 썼다. 그는 “화두를 잡으면 자료 조사와 답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강병기 기자
“흔히들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공부 안 하는 ‘인문학자의 위기’입니다. 인문학 공부는 지식 생산 라인에서 분업화된 전공이 아니라 총체적이고 실천적인 작업이어야죠.”

역사민속학자인 주강현(51·한국민속연구소장) 박사가 20여 년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책 ‘돌살-신이 내린 황금그물’(들녘)과 ‘두레-농민의 역사’(〃)를 동시에 펴냈다.

두 책은 일단 두께에 기가 질린다. ‘돌살’이 712쪽, ‘두레’가 835쪽이다. 두 권 다 앉아서 쓴 것도 아니다. 각각 1984년 경기만, 1980년 밀양에서 첫 답사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매년 최소한 한 번씩은 각 주제와 관련된 장기 답사를 거쳐 논문을 썼다. 구할 수 있는 자료는 모두 찾아 읽고 현지답사, 구술 채록을 통해 쓴 책들이다. 책에 실린 수백 장의 사진도 직접 찍었다.

주 박사는 두 책을 “사라져 가는 것들에 바치는 최후의 기록”이라고 불렀다.

돌살은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으려고 바다 쪽에 볼록하게 쌓은 돌담이다. 밀물과 함께 바닷가로 밀려온 물고기들은 썰물을 따라 다시 바다로 내려가다 돌담에 갇히고 만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는 인간의 지혜가 담긴 어법(漁法)이다.

두레는 모내기가 탄생시킨 상부상조하는 농민공동체로 농민들에게 두레식의 함께 사는 삶은 생존의 버팀목이었다.

두 책은 이처럼 생태적이며 자연친화적이지만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사라져 버린 우리 전래의 어법과 농법 문화를 꼼꼼히 살피고 있다. 자취를 찾기 어려운 두레, 돌살을 찾기 위해 전국에 발품을 팔았던 그간의 과정은 그야말로 ‘고(高)노동, 저효율의 연구’였다.

“돌살은 물 속에 숨어 있다가 노출되기 때문에 물때를 맞춰야 합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작을 때는 거의 답사를 할 수가 없고, 물이 나고 드는 시간이 밤이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죠. 자연과의 약속 시간을 지켜야 하는 답사였지요.”

그는 “이웃 일본은 중요한 돌살을 전부 문화재로 지정했는데 우리는 서해안 태안반도 일대에 세계 최대의 돌살 밀집지역을 갖고 있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어 아쉽다”고 했다.

또한 벼 포기 하나를 놓고도 ‘짚호미로 찍기’ ‘손으로 훔치기’ 등 다양한 농법으로 애지중지 키워 왔던 두레의 손노동이 오늘날 비효율로 무시되는 것도 안타깝다.

“두레로의 복고주의적 회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돕고 남의 집 농사일도 제 일처럼 해 주었던 두레의 공동체 정신에 주목하자는 것이죠.”

그는 친한 친구들에게서 ‘갯것들, 상것들 말고 좀 고상하고 우아한 것을 연구하라’는 충고를 귀에 못이 박이게 듣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민중생활사의 기록자, 실천적 인문학자”를 자임한다.

“예컨대 ‘갑오농민군 5만 명이 이동했다’는 기록을 보면 대개 이동의 목적에 주목하지만 나는 그들이 농사는 지어 놓고 갔을까, 이동 도중 쌀은 어떻게 구했을까, 그런 게 궁금해요. 그런 데 주목해야 역사의 결이 풍성해집니다.”

1987년 이래 지금까지 평균 1년에 2권꼴로 책을 써 온 그는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의 자택 옆에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건물을 지어 장서 2만5000권을 쌓아놓았다. ‘정발학연’이라 이름붙인 이 ‘서재’를 베이스캠프 삼아 1년에 서너 달은 답사를 떠나고 나머지 시간엔 집필에 몰두한다. 그는 “20여 년간 전방위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술독 묻듯 축적해 왔다. 그중 발효된 것들만 꺼내 놓겠다. 인문학자로서 지금이 시작”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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