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이 사건을 두고 공적인 충(忠)보다 개인적 효(孝)를 앞세웠던 조선 성리학자들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이 제기됐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는 최근 출간한 ‘한국 항일독립운동사 연구’(경인문화사)에서 “이인영의 낙향은 의병들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38회의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총탄이 다 떨어져 더는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 돼 이뤄진 것이며 부친 상례는 후퇴를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인영에게서 군권을 넘겨받은 허위가 병력을 후퇴시킨 뒤 전열을 정비하고 5월에 2차 서울탈환작전에 나섰던 것도 이때의 후퇴가 병력과 탄환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필요에 의해 이뤄졌음을 보여 준다고 신 교수는 주장했다.
신 교수의 미발표 논문을 새로 편집한 이 책은 또 1943∼45년 광복 직전 충칭(重慶)의 임시정부와 연안의 조선독립독맹,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등 3대 독립운동세력이 국내진입작전을 위해 연대와 협력을 추진했음을 역동적으로 재구성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사의 다양한 면모를 포착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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