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3년의 일본 한눈에… 서얼 출신 조선통신사 3인 기록 번역

  • 입력 2006년 4월 17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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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일본행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9년 뒤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차에 걸쳐 이뤄졌다. 이 중에서 11차인 1763년 계미년의 통신사행은 에도(江戶·현재의 도쿄)까지 갔다 온 마지막 사행으로 가장 많은 수의 사행록(9편)을 남겼다.

이 가운데 5편이 당대의 문장가였던 서얼 출신 선비 4명에 의해 쓰여졌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김인겸의 국문가사 ‘일동장유가’다.

다른 3명의 서얼 출신 선비들이 지은 4편은 한문으로 쓰였는데 이번에 소명출판에서 나란히 번역 출간됐다. 당시 사행의 공식기록 담당자였던 제술관 남옥의 일관기(日觀記·한글 제목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와 정사(正使)서기였던 성대중의 일본록(日本錄·‘부사산 비파호를 날듯이 건너’), 부사(副使) 서기였던 원중거의 승사록(乘사錄·‘조선 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과 화국지(和國志·‘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다.

남옥과 원중거, 성대중은 서얼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당시 이름 난 문인이었다. 남옥은 25세 때 과거시험 답안지를 대신 써 줬다가 유배까지 다녀와 출사길이 막힐 형편이었지만 워낙 글재주가 출중해 발탁된 인물로 사행길에 일본인들에게 지어준 시가 2000여 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의 일본에 대한 기록은 다른 통신사들의 기록에 비해 좀 더 섬세하고 객관적이다. ‘대마도인과 달리 일본 본토인은 중후하고 너그럽다’며 대마도인과 일본 본토인의 차이를 지적하고, 대마도인과 조선 역관들의 농간에 의해 양국 관계가 왜곡되고 있음을 비판하는가 하면 일본 유학자들과 문인들을 섬세하게 분류하고 있다.

또 북학파와 교유했지만 훗날 정조의 문체반정을 지지했던 성대중과 실학적 면모가 더 뚜렷했던 원중거가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안용복을 높이 평가한 글을 나란히 남긴 점도 흥미를 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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