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마경덕 ‘무꽃 피다’

  • 입력 2006년 3월 9일 03시 01분


코멘트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후다닥 무언가 뛰쳐나간다. 가슴을 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꽃이다. 까만 봉지 속이 환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묵은 무 한 개 꽃자루를 달고 있다. 베란다 구석에 뒹굴던 새득새득한 무. 구부정 처진 꽃대에 연보랏빛 꽃잎 달렸다. 참말 독하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꽃을 피웠다. 손에 얹힌 무, 몸집보다 가볍다. 척, 제 무게를 놔버리지 못하고 주저주저 망설인다. 봄이 말라붙은 무꼬랑지 쥐고 흔들어댄 모양이다. 창을 넘어와 봉다리를 풀고 무를 부추긴 모양이다.

눈을 뜨다 만 무꽃. 여기가 어디라고 덜컥, 꽃이 되었던가. 어미 살을 파먹고 꽃이 된 무꽃. 쪼그라진 젖을 물고 있는 무꽃.

- 시집 '신발論'(문학의전당) 중에서

냉장고나 베란다를 뒤지다가 누구나 한 번쯤 저 놀라운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비닐봉지를 열어보면 후다닥’ 뛰쳐나가는 것들. 때론 시퍼런 감자 움이, 때론 붉은 고구마 싹이, 때론 노오란 양파 순이 어둠 속에서 뛰쳐나오곤 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봄날의 모든 싹눈과 꽃눈과 잎눈은 어둠 속에 있던 것들이다. 개나리의 노란 꽃잎도, 진달래의 붉은 꽃잎도 제 가슴을 찢고 나오기 전까지는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다. 생명이란 ‘그곳이 어디든’ ‘덜컥’ 움이 되고 꽃이 되는 것이다. 봄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봄은 어디 먼 데서 은총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내 속이 열어젖히는 것이다.

―시인 반칠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