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6년 동아일보 2차 무기정간

  • 입력 2006년 3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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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3월 6일,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의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제2차 무기정간’이다. 소련에 본부가 있던 국제농민회에서 그달 1일 동아일보로 보내 온 전문(電文)을 5일 보도하자 총독부가 트집을 잡은 것이다.

‘오늘 귀국민의 제7회의 슬픈 기념일을 당하여…이 위대한 날의 기념을 영원히 조선의 농민에게 그들의 역사적인 국민적 의무를 일깨울 것으로 믿으며 자유를 위하여 죽은 이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을지어다….’

‘슬픈 기념일’은 바로 ‘3·1절’이다. ‘자유를 위하여 죽은 이에게…’라는 구절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전문을 보도하기까지 동아일보사 내부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편집 실무자들은 게재에 반대했고 주필이던 송진우(宋鎭禹)는 게재할 것을 주장했다.

논란은 시대 상황 때문에 빚어졌다. 이 무렵 총독부는 조선의 언론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기사를 삭제하고 압수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심지어 윤전기까지 압수하는 등 악랄한 방법으로 신문사의 뿌리까지 뽑으려 들었다. 동아일보의 경우 1923년까지 한 해 20건 안팎이던 기사 압수 처분이 1924년에는 68건, 1925년에는 73건으로 급증했다.

1925년 8월에는 천도교 계열의 월간지 ‘개벽’이 망명 애국지사들의 근황을 소개했다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일제는 개벽의 광고를 실었다고 동아일보를 압수할 정도였다. 이 사건은 광고 게재를 문제 삼아 신문을 압수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이토록 박해가 심하니 문제의 전문을 실으면 그 뒤의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정간 처분을 받을 테고 신문사는 경영난을 겪을 것이었다. 편집 실무자들은 당장 신문사에 닥칠 어려움을 걱정해 전문을 게재하는 데 반대했으나 송진우는 신문을 살리는 길이라며 게재하자고 고집했다.

이 사건으로 송진우는 징역 6개월을, 발행 겸 편집인 김철중(金鐵中)은 금고 4개월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는 4월 19일 정간 처분이 해제돼 21일부터 신문을 다시 낼 수 있었다.

당시 조선 언론계에서는 기사가 압수되면 기자들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환영 지지하면서 쾌재’(동아일보사사 권1)를 불렀다. ‘신문 제작을 애국운동’으로 알았기 때문에 기자가 보도와 관련하여 수감되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독자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송진우 등이 수감될 때 기자단체인 무명회(無名會)는 서울 명월관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수감 기념 잔치’를 벌인 것이다.

여규병 기자 3spring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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