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두 농부, 21세기 新유목민을 비판하다

  • 입력 2006년 3월 2일 03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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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노마드(Homo Nomad·유목하는 인간). 21세기의 신(新)인류다. 세계화와 더불어 휴대전화와 무선인터넷으로 무장한 ‘디지털 노마디즘’이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떠올랐다. 기업 경영에서도 쉼 없이 이동하며 제국을 이룬 몽골의 칭기즈칸이 최고경영자(CEO)의 새로운 모델로 부상한 지 오래다. 유목주의는 ‘세계화’와 ‘디지털’이라는 두 키워드가 점령한 현대의 금과옥조처럼 수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목주의의 유행에 문제는 없는 걸까. 유목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정착민의 철학을 지닌 두 명의 농부가 ‘현대의 미신’인 유목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환경운동가인 천규석 씨가 지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와 미국의 시인 겸 문명비평가인 웬델 베리 씨가 쓴 ‘삶은 기적이다’(녹색평론사)는 책이 최근 잇따라 출간됐다.

저자들은 정착민의 대표 격인 농부이자 지식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천 씨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귀향해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며 한살림운동 대구 공동체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해 왔다. 베리 씨는 뉴욕대 등에서 영문학, 문예창작을 강의하다 1960년대 중반에 사직하고 켄터키 고향마을로 돌아가 40년간 농사를 지으며 4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천 씨는 자신의 책에서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대안적 생활방식으로 급부상한 유목주의가 사실은 침략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생활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유목으로 생계를 꾸려갈 경우 가구(5인 가족 기준)당 30여만 평의 땅이 필요한 반면 농경으로 살려면 1가구에 필요한 땅은 일모작이냐 이모작이냐에 따라 900∼1800평에 불과하다. 즉 “최소한의 토지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생태 경제적 측면에서 유목은 지속이 불가능한 생계 양식이며 자급자족적이지 않은 결핍적 존재”라는 주장이다.

이는 과거 유목민이 도시와 국가를 세울 때 필연적으로 인근 농경민에 대한 침략과 농업생산물의 탈취를 통해 국가를 유지하려 했던 데에서도 드러난다. 천 씨는 “지금 전 세계를 휩쓰는 세계시장 제국주의도 그 침략성, 수탈성에서 유목주의와 닿아 있다”며 칭기즈칸은 오늘날 미국과 그 확대 연장선상에 있는 ‘세계시장’이란 신제국주의의 선구자라고 비판했다.

베리 씨의 ‘삶은 기적이다’는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씨가 쓴 ‘통섭’에 대한 비판 형식의 책이지만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는 현대 사회의 이동 현상을 비판하면서 “독창성과 혁신에 대한 숭배는 실은 무엇이든 사고파는 일에 내가 꼴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의 발을 밟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획일주의자가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거리”라고 주장했다.

‘통섭’에서 윌슨 씨는 ‘오늘날 우리는 전 지구를 홈그라운드로 삼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베리 씨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인간도 전 지구를 알았던 적이 없다. 이 ‘세계여행’의 시대에도 전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은 너무 커진 이동성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어디서도 살고 있지 않다. 우리가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친밀하게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애정을 갖고 알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한 장소에 오래 살아야 한다.”

유목주의자가 숭상하는 혁신과 낯섦, 가 보지 않는 곳을 발견하는 일 대신 친숙함,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해 잘 아는 것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프랑스 곤충학자 앙리 파브르가 생애 마지막 30여 년을 ‘사방 벽으로 둘러싸인 자갈밭 한 뙈기’ 안에 있는 곤충들과 그 밖의 동물을 연구하면서 소중한 발견을 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혁신은 인간의 재능과 수단에 의해 한정되지만 친숙함은 살아 있는 한 무한히 확대되며 삶의 한계에 의해서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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