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히딩크와 정명훈, 그들의 수학

  • 입력 2006년 1월 21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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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서울시향의 예산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지금 시향의 연주도 예전보다 두 배 나아졌어요.”

어젯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베토벤의 ‘운명’을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정명훈 씨. 2006년부터 서울시향의 예술감독으로서 시향을 본격적으로 이끌게 된 그는 최근 만남에서 계약기간인 2008년까지의 청사진을 설명하며 ‘숫자’들을 제시했다.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 수준이 100%라면 80% 수준까지는 어지간한 오케스트라도 열심히 하면 도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상위 1∼2%에 들기는 대단히 어렵죠. 4, 5년 후의 시향 수준은….”

‘마에스트로’가 숫자를 늘어놓는 것은 낯설었다. 그 낯섦이 운동경기를 두고 숫자를 얘기하던 한 사람을 기억나게 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 51일을 남겨 두고 연 기자회견에서 히딩크 감독은 “대표팀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현재 50%다. 앞으로 하루에 1%씩 기량을 향상시켜 월드컵 개막과 함께 100%로 만들겠다”고 했다. 축구경기에서 한 팀이 열 명인지, 열한 명인지조차 헷갈리던 내게도 당시 히딩크 감독의 발언은 ‘초등학교 저학년 덧셈 같은 비유다’ 싶을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얘기였다. 그러나 한국팀이 16강, 8강의 벽을 계속 넘자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이래 어디를 가든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다니며 선수 개개인의 데이터를 관리했다는 점이 조명됐다. 그가 제시한 숫자는 비유가 아니라 ‘팩트’였다고 새삼스레 해석됐다.

히딩크 감독과 지휘자 정명훈 씨가 닮은 점은 그들 머릿속의 숫자가 ‘실물’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개막 한 달여 전까지 ‘베스트 11’을 결정하지 않았다. 많은 전문가가 “빨리 팀을 꾸려야 한다”고 걱정했지만 히딩크 감독은 마지막 순간까지 70명이 넘는 선수를 테스트하고 관찰했다.

시향을 맡으며 정명훈 씨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오디션’이다. 단원 96명 전원을 오디션해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을 결정했지만 단원들은 ‘오디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몇몇 연주자의 자리가 비어 있어요. 최고의 화음을 낼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거죠.”(시향 단원)

3년 후 정명훈 씨의 계산법이 히딩크 감독처럼 성공적으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잘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펴기 위해 숫자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열심히 하면 3년 후 유럽의 일급 오케스트라 수준은 될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시향 단원들이 오전 오후 계속되는 연습과 서울 시내 각 구민회관 연주, 전문 공연장 정기 연주로 이어지는 강행군을 “의미 있는 트레이닝”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의 계산이 오랜 오케스트라 운영 경험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정명훈 씨와 히딩크 감독의 숫자는 수학이나 경영이 아니라 음악과 축구의 완성을 위해 존재한다. 아름다운 연주도, 축구경기의 명승부도 결코 그것을 즐길 여력이 있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

정명훈 씨가 서울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시향을 지휘하던 11일, 내가 본 가장 환한 미소는 행여 다른 관객에게 방해가 될까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문가에 서서 연주를 듣던 한 젊은 어머니의 얼굴에 어린 것이었다.

정은령 문화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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