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박지원-박제가 서거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

  • 입력 2005년 10월 12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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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개막할 제2회 실학축전의 상징물로 쓰일 5m 높이의 백탑. 박지원과 박제가가 이끌었던 백탑파를 상징하는 이 탑을 덮은 한지에는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3인 초상의 왼쪽부터)의 시서화 작품들이 담겨 있다. 사진 제공 경기문화재단
13일 개막할 제2회 실학축전의 상징물로 쓰일 5m 높이의 백탑. 박지원과 박제가가 이끌었던 백탑파를 상징하는 이 탑을 덮은 한지에는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3인 초상의 왼쪽부터)의 시서화 작품들이 담겨 있다. 사진 제공 경기문화재단
▼연암, 개혁의 꿈 白塔에 쌓고 가다▼

200년 전인 1805년 10월 20일(음력)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은 6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그보다 열두 살 어리지만 평생 지기(知己)였던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1759∼1805)는 그보다 6개월 앞선 4월 25일 함경북도 종성의 유배지에서 풀려난 직후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연암이 중심이 됐던 ‘백탑파’ 지식인들을 등용했던 개혁군주 정조(1752∼1800)가 세상을 떠난 뒤 5년 후였다. 조선의 부흥을 꿈꾸던 지식인들의 꿈이 스러지는 순간이었고 스산한 19세기가 왕조의 황혼을 재촉하는 신호탄이었다. 박지원의 묘소는 지금 북한 땅인 경기 장단군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초정의 묘소는 경기 광주시에 있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이다.

역사의 주류에 서지 못했지만 18세기 조선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지식인인 연암과 초정의 서거 200주년을 맞아 학술대회가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경기도가 주최하고 한국실학학회와 한국한문학회가 공동 주관한다.

실학자들은 크게 경세치용(經世致用)학파와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로 나뉜다. 경세치용학파가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고대의 이상국가로 회귀를 꿈꿨다면 이용후생학파는 근대적 감수성을 지니고 과학기술을 통해 개혁사회를 꿈꿨다. 연암과 초정은 농촌의 붕괴로 도시 인구가 급증하는 한양을 무대로 활약한 이용후생학파였다. 또한 북벌(北伐)의 대상이었던 청(淸)을 북학(北學)의 대상으로 전환시킨 북학파였다.

이번 학술대회에선 △동아시아의 문명사적 전환기였던 18세기의 선도적 지식인 △도시적 감수성을 지닌 문화예술인 △청과의 문물교류를 통해 부국강병을 꿈꾼 개혁가 △근대성을 뛰어넘은 탈근대적 지식인으로서의 연암과 초정의 면모가 종합적으로 고찰된다.

특히 연암이 중심이 돼 서얼 출신의 초정과 유득공, 이덕무가 함께 어울린 문화집단으로서 ‘백탑파’의 일상에 대한 분석이 눈길을 끈다. 이들이 박지원의 집에서 가까웠던 현재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10층석탑 주변에서 자주 모인 데서 ‘백탑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13∼23일 경기 남양주시 다산유적지에서 열리는 실학축전 행사의 일환이다. 지난해에 이어 2회를 맞는 실학축전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과 함께 연암과 초정을 이번 축제의 주빈으로 초청했다. 031-236-173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박제가의 인간적 면모 새롭게 조명▼

이번 학술대회에선 특히 직설적 성격에 불우하게 생을 마친 초정 박제가의 인간적인 면모가 생생히 조명된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는 ‘초정 박제가의 인간면모와 일상’이라는 발표문에서 백탑파의 멤버 중 한 사람이었던 이기원(李箕元·1745∼?)의 문집 ‘홍애집(洪厓集)’에 수록된 시 7편을 통해 초정의 또 다른 모습을 조명했다. 연세대가 소장하고 있는 홍애집은 그동안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초정과 냉재(冷齋·유득공)는 악인연이라/기묘한 조롱과 해학으로 막상막하 다투네/오후에는 청장관(靑莊館·이덕무)이 교감(校勘·관직명)을 마치고서/소리 없이 걸어와서는 백중(伯仲)간에 서네.”

이 시에 묘사됐듯이 서로 악동 기질이 농후했던 초정과 냉재는 만나기만 하면 아웅대는 사이였던 반면 인품 반듯하기로 유명한 이덕무는 모임의 총무격이었던 것 같다.

초정은 43세에 상처했다. 홀아비가 되고 부여현감직마저 잃은 초정은 심신을 식힐 겸 경상도 안의현감으로 있는 연암 박지원을 찾아갔다. 연암은 13세 된 어린 기생을 초정의 잠자리에 들여보냈다. 다음날 아침 연암이 “데려가 소실로 삼으라”고 권했지만 초정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안의 기생은 정이 끌리나 어려서 아깝다”는 이기원의 시구는 이때의 초정의 심정을 짓궂게 놀리고 있다.

그 후 초정이 젊은 소실을 얻자 이기원 등은 “자네가 젊은 여인을 어떻게 감당하려는가”라고 놀렸다. 그러자 초정은 “내가 소시(少時) 적엔 말이지, 관서(關西) 땅 동기(童妓·어린 기생)와 함께 서까래 같은 촛불 두 개를 켜 놓고는 먼동이 터올 때까지 밤이 새도록 뒹굴고 나니 촛불도 바닥을 보였지”라고 받아친다.

초정은 작은 체구와는 달리 대식가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이기원은 초정의 소실로 들어가는 딸에게 그 어미가 당부하는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은 익살스러운 시를 남겼다.

“매사에 어기지 말고 신중하고 부지런해야 한다/만두는 백 개, 냉면 세 그릇이나 먹는다니/낭군의 식성은 작은 아씨(초정의 딸)가 잘 안다더라.”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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