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권장도서 100권]<49>인간의 조건-앙드레 말로

  • 입력 2005년 5월 30일 03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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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가 비극적인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 스스로 구원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태도로 이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일까?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따로 있는 것일까? 앙드레 말로는 ‘인간의 조건’에서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것이 체제적이고 전체적인 것과 맺고 있는 관계를 조망하고, 한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행위’임을, 그리고 그 행위는 역사 속에서 정당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삶의 역사성’을 강조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조건’은 1927년, 중국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의 주도 아래 총파업이 일어나고 군벌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하고 분열하는 과정과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도 코민테른의 지도 노선에 충실한 인물과 공산당의 지령을 거부하는 소수파 사이의 갈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등장인물은 순간순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고뇌에 빠져드는데, 말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인물을 형상화하고 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우세한 세력에 밀착하여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는 은행가 페랄,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무책임한 클라피크, 공산주의자에게서 받았던 고문 때문에 증오에 차 있는 쾨니히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에는 자신의 출신 계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물질이나 환상 또 복수에 집착하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해관계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말로는 한 인물의 가치는 사유나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특히 죽음 앞에서의 마지막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은 혁명가에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이들은 신분과 국적을 넘어 동지애로 묶여 있고 상황을 인내하고 숙명을 거부하기 위해 행동하는 인물이다.

상하이 폭동을 주도했던 기요는 새로운 폭동을 꾀하다가 잡힌 후 독약을 먹고 자살하며, 첸은 장제스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안고 승용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첸이나 기요는 행동하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실패’의 신화를 보여 준다. 그러나 카토우는 체포된 후 다른 죄수에게 자기 몫의 독약을 건네주고 산 채로 열차 화통에 던져지는 영웅적 죽음을 선택한다. 그의 죽음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증오의 고리를 깨뜨리고 인간성을 재천명하는 순간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죽음을 넘어선 죽음, 공동체 의식에 뿌리박은 ‘인간’의 죽음이다. 이처럼 말로는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인간은 희생자일 수밖에 없지만 절망적인 순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진정한 영웅이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의 조건’은 가벼움과 차이를 중시하고 개인을 우선시하며,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현대 문학과는 다른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문학적 의미는 선택과 행위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문학을 통해 역사 속의 개인들을 형상화하고 역사를 통해 새로운 문학의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유호식 서울대 교수·불어불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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