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의적, 정의를 훔치다’…홍길동-로빈 후드 공통점은

  • 입력 2005년 5월 20일 16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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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은 당대 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욕구를 반영하지만 체제 이데올로기와 직접 대결하는 경우는 드물다. 왼쪽부터 영국 노팅엄의 로빈 후드 조형물, 산적 출신으로 인도 국회의원을 지낸 풀란 데비, 미국 서부 개척기의 열차강도 제시 제임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의적은 당대 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욕구를 반영하지만 체제 이데올로기와 직접 대결하는 경우는 드물다. 왼쪽부터 영국 노팅엄의 로빈 후드 조형물, 산적 출신으로 인도 국회의원을 지낸 풀란 데비, 미국 서부 개척기의 열차강도 제시 제임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의적, 정의를 훔치다/박홍규 지음/299쪽·1만2000원·돌베개

“세계 각국의 유명인사 1등은 모두 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면 알 수 있다. ‘홍길동’ 씨가 쓴 규범에 따라 각종 서식을 채워 넣지 않는가. 영국에서는 로빈 후드, 러시아에서는 스텐카 라진, 멕시코에선 판초 비야가 이와 비슷하게 민중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무엇이 의적을 의적답게 만드는 것일까. 의적을 강도와 구분하며 사랑받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저자는 ‘공동체의 가치나 규율에 속해 있다’는 데서 그 특징을 찾는다. 폭압을 휘두르는 관리는 응징하되 사회적 가치의 중심인 군주에 대해서는 충성을 표시하고, 민중의 보호자로 자처하는 ‘신사’라는 점에서 의적은 민중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된다.

의적의 대명사는 역시 로빈 후드. 그런 그의 이미지도 시대에 따라 변신했다.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자 그의 신분이 귀족 출신으로 상향 조정됐다. 그의 성격도 무법자가 아니라 여성을 따뜻하게 대하는 온화한 신사라는 점이 강조됐다. 당대 영국사회의 보수화가 로빈 후드 이야기를 연애 중심의 감상적인 이야기로 변화시킨 것이다. 지난 시절 한국 대학가에서 미의 상징이었던 ‘5월의 여왕’이 로빈 후드의 애인인 매리언을 뽑는 영국 5월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도 눈길을 끈다.

의적 이야기는 일정하게 당대 사회의 모순을 반영한다. 가장 최근의 유명 의적인 인도의 ‘밴디트 퀸’(산적 여왕) 풀란 데비는 불가촉 천민의 원한을 결집한 존재였다. 남북전쟁 직후 미국 서부의 황야를 종횡무진 누빈 제시 제임스는 황야에 세워진 은행이나 철도회사와 같은 신흥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을 먹고 컸다. 농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농민들은 빚을 내 토지와 농기구를 샀고, 그중 많은 수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이 ‘무법자’를 응원했다.

‘해적’도 의적의 범주에 끼워 넣을 수 있을까. 해적은 다른 의적과 달리 개인의 영웅적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는다. 비인간적인 선장의 권위에 대항해 일어난 결과 집단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전 때가 아니면 회의에서 다수 의견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다. 해적들도 오로지 약탈만을 목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상선을 붙잡으면 선원을 학대한 선장을 응징하고 인도적으로 배를 지휘한 선장은 무사히 돌려보냈다.

영남대 법과대 학장으로 재직 중인 법학자이자 미술, 음악, 문학 등에 걸쳐 전방위 글쓰기꾼으로 활동 중인 저자는 30대 후반에 로빈 후드의 근거지인 노팅엄에 찾아가 1년 동안 살 정도로 일찍이 ‘의적’이란 존재에 매료됐다. 그런 그가 재판정에서 법관으로 의적을 만난다면 어떤 입장을 취할까. 책의 말미에서 그는 뜻밖에도 법에 ‘겸손하라’고 당부한다.

“법과 범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법학자의 입장과는 다르다. 인류의 4대 성인 가운데 소크라테스나 예수도 법의 이름으로 처형당했다. 당대의 법이나 재판이 옳았다고 해도 역사는, 민중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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