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산책]‘클리어링’…납치된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다면?

  • 입력 2004년 12월 30일 15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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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년) ‘은밀한 유혹’(1993년)에 출연했던 로버트 레드퍼드를 기억한다면 그의 최신작 ‘클리어링(The Clearing)’이 어떤 서글픔을 줄지 모르겠다. 올해 67세인 레드퍼드의 눈가와 입가는 안쓰러울 만큼 쭈글쭈글해졌고, 로맨틱한 미소 대신 피할 수 없는 피로감이 표정을 덮고 있으니 말이다.

달리 보면, 레드퍼드의 이런 얼굴은 영화 ‘클리어링’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적어도 표면적으론 ‘범죄스릴러’인 이 영화는 속으론 장년에 접어든 부부의 인생 속에서 불현듯 ‘사랑’이란 단어를 끄집어내 ‘네 사랑의 진실은 무엇인가’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영화가 주는 답은 어쩌면 사랑보다 슬프다.

성공한 사업가 웨인(로버트 레드퍼드)은 출근길에 한 남자에게 납치당한다. 범인은 웨인과 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아널드(윌리엄 데포). 웨인을 동경하고 질투했던 그는 회사에서 해고된 후 납치사건에 가담했다. 아널드는 납치를 주도한 자에게 웨인을 넘기기 위해 숲 속으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웨인과 갈등하면서도 친구 같은 관계를 이룬다. 한편 경찰에 남편 웨인의 실종신고를 낸 아내 에일린(헬렌 미렌)은 조사과정에서 남편이 정부(情婦)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음을 알게 된다.

‘클리어링’에는 시간과 시점(視點)을 달리하는 두 개의 이야기가 평행선처럼 달린다. 하나는 웨인이 아널드에 의해 납치돼 산속을 끌려다니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고, 또 다른 하나는 아내 에일린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으로 시작해 남편에 대한 최종 소식을 듣기까지의 수일간의 이야기다. 어찌 보면 범죄극 치곤 밋밋한 이 영화의 정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이 두 개의 이야기가 드러내는 ‘시점의 차이’다.

납치극을 기화로 사랑의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 ‘클리어링’. 외도 사실이 드러난 남편 웨인(앞)은 납치범 아널드에게 “그래도 난 아내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의 고백은 여전히 유효할까. -사진제공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래도 난 아내를 사랑한다”는 남편, 그리고 남편의 외도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 아내가 이루는 시점의 간극은 이상하게도 점차 줄어든다. 남편의 외도가 ‘사랑’이었으며, 자신에 대한 남편의 사랑도 ‘사랑’이었다는 믿기 힘든 사실을 에일린이 인정하는 순간 간극은 비로소 ‘제로’가 된다. 이 영화는 외도한 웨인에게도, 범죄를 저지르는 아널드에게도 잘잘못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웨인이나 아널드나 에일린이나 심지어 남편의 정부까지, 그들 모두가 (적어도 각자의 입장에선) 100% 진심을 말하고 있다니! 바로 이런 태도는 이 영화로 하여금 스릴러의 속도감을 희생시키는 대신 혼란스러운 인생의 진실에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든다.

‘클리어링’은 납치범죄극의 눈에 익은 플롯에는 관심이 없다. 납치 순간이나 피랍자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처럼 극적인 뭔가가 기대되는 대목에 이르면 의도적으로 구멍을 뻥 뚫어놓고, 다음 이야기를 해 버린다. 그럴수록 관객은 이상하게도 강렬한 심적 격동을 체험한다. 이는 (범행 당일 아침 콘플레이크를 소심하게 씹어 먹는 아널드의 모습에서 드러나듯) 최소한의 대사와 행위로도 인물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축할 정도로 세밀하고 효율적인 디테일을 갖췄기 때문이다.

로버트 레드퍼드와 윌리엄 데포는 대배우가 아닐 수 없다. 서로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은 기억에서 지우기 힘들다. 거기엔 자신을 향한 연민, 분노, 광기, 상대에 대한 환멸, 허황된 자신감, 두려움이 모두 들어 있다. 헬렌 미렌(‘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고스포드 파크’)의 몸과 얼굴과 언어에는 어쩌면 그렇게 중년을 넘긴 여성의 욕망과 아름다움, 계층적 자존심과 절망감, 그리고 성적 매력까지가 은근슬쩍 담겼을까.

외도가 드러난 남편이 죽음의 문턱에 섰다. 아내에게 쪽지를 남긴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남편의 이런 문구는 용납될 수 있을까. 영화는 말한다. 사랑은 결국 진실로 판명 (클리어링·clearing)된다고. 사랑인 한 다 진실이라고.

‘펠리칸 브리프’ ‘히트’ ‘인사이더’를 만든 네덜란드 출신 제작자 피터 얀 브루게의 감독 데뷔작. 내년 1월 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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