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집 짓기]<4>산 넘어 산-신고식,토목공사,상량식

  • 입력 2004년 12월 16일 15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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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량식 날 돼지머리와 떡으로 고사상을 차렸다. 남편이 상량문을 읽고 있다.
상량식 날 돼지머리와 떡으로 고사상을 차렸다. 남편이 상량문을 읽고 있다.
개발행위 허가가 나왔으니 세금을 내고 증서를 받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밭에서 대지로 용도 변경을 하는 세금이 무려 평당 3만5000원. 이른바 ‘대체농지 조성비’란다. 용도 변경을 한 넓이가 220평이었기 때문에 800만 원 가까운 세금을 냈다. 평당 5만 원을 채 안 주고 산 땅인데 땅값의 70%에 이르는 세금을 내다니. 농지를 훼손한 대가라고 했다.

허가를 받았으므로 바로 공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토목공사를 위해 장비와 기사를 구했는데 이번에는 비가 와서 이틀 동안 발이 묶였다. 일을 못했어도 장비를 투입했기 때문에 대금을 치러야했다. 허공에 사라진 비용이 또 150만 원. 날씨가 이렇게 심각하게 영향을 미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공사 현장을 오르내리며 우리 땅을 소개해 준 중개인과 가까워졌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마을의 새마을 지도자라고 했다. 이것저것 마을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니 “외지인이 이사 오는데 마을의 어르신들께 인사를 한번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의 안내로 이장님과 노인회장님을 소개 받았다. 이주 인사로 경로당에 겨울 연료비를 찬조했다.

우리 집을 짓기 위해 중장비들이 오르내리며 마을 도로의 일부를 훼손하므로 보수의 책임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도로 보수비용의 절반 정도를 우리가 부담키로 했다. 이것으로 마을 전입 신고식을 모두 마쳤다.

9월은 유난히 비가 잦아서 공사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 하늘만 바라봤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집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토목공사를 시작하자 땅의 겉모습만 봐서는 전혀 알 수 없던 문제가 터졌다. 건물을 세우기로 한 자리에서 물이 너무 많이 나와 공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먼저 배수로를 내고 물길을 잡는 공사를 했다. 또 땅의 높낮이 차이가 너무 심해 덤프트럭 150대분의 흙을 사다 붓고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돌을 사다 석축을 쌓았다. 윗집과 경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돌담을 다시 쌓기도 했다. 이렇게 토목공사에 들어가는 돈은 건물을 짓는 공사비와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건축주가 모두 부담해야 했다.

토목공사를 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좋은 분들을 만났고 그분들이 일을 꼼꼼하게 해주신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새참을 꼭 챙겨 드시고 약주도 많이 하시고 점심 후에는 한잠 주무셔야 하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일하시는 분들을 어떻게 챙겨드려야 할지 내심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엔 전혀 달랐다. 허둥지둥 다니느라 현장에 갈 때마다 빈손으로 가서 민망해 해도 오히려 맛있는 커피를 손수 타서 주시기도 했다. 공사에 방해가 된다고 술은 막걸리 한 잔도 안 드셨다. 정말 감사했다.

토목공사를 어렵사리 끝내고 나니 그 다음 공사는 쉽게 척척 진행됐다.

드디어 10월 23일 상량식을 하기로 했다. 날짜가 정해지자 양가 어른들과 형제들에게 알렸다. 글씨를 잘 쓰시는 시어머님께 대들보에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대들보를 올리기 전날 나는 시루떡과 고기 등을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남편은 우리 집의 이름을 짓고 상량문을 쓰느라 골몰했다. 남편은 고등학교 시절의 고문(古文) 실력을 발휘해 자신의 뜻과 감상을 담은 멋진 상량문을 지었다. 집에는 ‘아이들의 웃음이 넘쳐나는 집’이라는 의미로 ‘동소헌(童笑軒)’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남편은 43세의 늦은 나이에 아동학 공부를 다시 시작한 내가 이 집에서 아이들의 웃음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더욱 공부하고 노력하길 바란다는 의미도 담았다고 했다.

상량식 날 그동안 공사하느라 애쓴 분들과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전날 종일 글씨 연습을 하신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상량 판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龍’자와 ‘龜’자를 쓰셨다. 친정아버님은 ‘童笑軒’이라는 글씨를 써서 보내주셨다. 상을 차린 후 남편이 상량문을 읽고 모인 분들이 모두 돌아가며 술을 따르고 덕담을 나눠주셨다. 상량문을 붙인 판을 마룻대에 매달아 올려붙였다. 그리고 동네 분들께 떡과 음식을 나누어 돌렸다. 식구들과 동네 분들, 그리고 일하시는 분들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진 ‘축제’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고은희 ehsophia@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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