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비평 가을호 ‘무능력 담론’ 특집

  • 입력 2003년 8월 17일 17시 20분


코멘트
카드 빚에 쫓기는 신용 불량자, 입사 원서를 내는 족족 퇴짜 맞는 취업 재수생, 잠자리에서 시원찮다며 아내에게 홀대받는 가장, 성형수술 실패를 비관해 자살하는 중년 여성.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적으로 ‘무능력자’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돈이 없거나 성적 능력이 없으면 무능하다고 한다. 외모가 자본으로 통용되는 사회에서 성형수술의 실패는 중요한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심지어 직업이 있고 외모가 준수한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나는 유능한가’를 반문하며 강박증에 시달린다.

이달 말 출간되는 계간 ‘당대비평’ 가을호는 이런 사회적 현상에 주목해 ‘무능력 담론’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무능력’을 매개로 한국 사회를 읽어보려는 시도다.

김광진 '고향바다'

편집주간인 김진호 목사는 무능력자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실제 행위능력이 없고 능력을 기대받지도 않는 ‘N(Negative)-N’형이다. 법적으로는 미성년자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등이 이에 속한다. 신체장애인이나 노인 등도 비교적 능력이 없고 기대도 받지 않으므로 ‘N-N’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P(Positive)-N’형으로 실제 행위능력은 있는데 기대가 크기 때문에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다. 여기서 무능하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의 대상보다 상대적으로 더 무능하고 비판 대상자의 행위 결과에 영향받는 존재다. 평범한 월급쟁이 가장이 소비 수준이 높은 아내와 자녀들로부터 ‘무능한 가장’이라고 비난받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김 목사는 ‘P-N’형 무능력 담론에 긍정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정 또는 국가에서 절대 권력을 누리던 가장과 권력자에게 무능함을 따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민주화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능력이 있는데도 무능하다고 비판받는 입장에서는 무능력이 일상화되고 무능력이 개인 탓으로만 돌려짐으로써 사회적 문제의식을 이완시키는 부작용도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평론가 서동진씨는 노동과 무능력의 문제를 짚었다. 그는 사람들이 무능력자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이유가 “노동과 인간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 즉 인간은 노동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씨는 “탈근대적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은 무능력이란 담론 자체가 무능력한 시대”라고 주장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일정량의 나사를 조이거나 부품을 조립해내면 그만이었다. 졸업장과 자격증은 유능함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서류였다. 하지만 지식경영을 강조하는 탈근대자본주의에서 능력은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이다.

“업그레이드는 완성된 상태란 없다는 것을 알리는 완곡어법이고, 업데이트는 능력을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들려주는 세련된 말장난이다. 결국 탈근대자본주의는 언제나 무능력한 주체를 요구한다.”

서씨는 ‘백수’를 향한 혐오와 반감도 사실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불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문학평론가인 이경 부산대 연구교수는 능력 중심의 사회가 남성주의적임을 지적한 뒤 “결혼의 거부가 반 가부장적 운동을 포함하고 있듯이, 직장을 그만두는 등 무능력을 선택하는 여성에게는 반(反)자본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