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패션]패션 in 패션/“고티에씨, 대박을 부탁해요”

  • 입력 2003년 6월 12일 16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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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적인 패션의 대명사격인 장 폴 고티에(왼쪽)가 최근 에르메스 여성복 부문의 디자이너로 영입됐다. 오른쪽은 클래식한 분위기의기존의 에르메스 컬렉션. 아방가르드와 클래식의 만남이 어떤 변주곡을 빚어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사진제공 퍼스트뷰코리아

◀전위적인 패션의 대명사격인 장 폴 고티에(왼쪽)가 최근 에르메스 여성복 부문의 디자이너로 영입됐다. 오른쪽은 클래식한 분위기의기존의 에르메스 컬렉션. 아방가르드와 클래식의 만남이 어떤 변주곡을 빚어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사진제공 퍼스트뷰코리아

5월 19일 프랑스의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는 장 폴 고티에를 차기 디자이너로 기용한다고 발표했다. 에르메스는 소위 ‘명품’으로 불리는 고급 브랜드 가운데서도 최고가(最高價)를 자랑하며 전 세계 상류층 명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에르메스의 특징은 브랜드 로고를 전면에 내세워 ‘졸부 근성’에 부합하거나 튀는 디자인으로 주목을 끄는 대신 귀족적이고 무난한 디자인을 고수하는 데 있다. 지난 6년간 이 브랜드를 맡아온 전임 디자이너 마르탱 마르지엘라는 무게감 있는 차분한 디자인에 충실했다.

배턴을 물려받은 고티에는 어떤가.

그는 1990년 가수 마돈나가 ‘블론드 앰비션’이란 이름으로 세계 순회 공연을 할 때 입었던 무대 의상을 디자인했었다. 금속성 소재로 양쪽 젖가슴 부분을 뾰족하게 표현한 섹시한 코르셋은 마돈나의 성적 매력에 힘을 더했다. 이어 ‘제 5원소’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등 SF 판타지 영화 의상 디자인을 맡아 실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옷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다.

한 마디로 그의 옷은 아방가르드하며 섹시하다.

이처럼 성격이 다른 에르메스와 고티에가 과연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에르메스는 오랜 전통을 가진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쇼맨십 넘치는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를 영입한 뒤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데 고무돼 같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을 듯하다. 하지만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1940년대 세계 2차대전의 여파로 밀리터리풍 패션이 한창 유행하던 때에도 여성의 허리선을 잘록하게 표현한 디자인의 ‘뉴룩(new look)’을 선보이면서 디자인의 혁명을 이뤄낸 바 있다. 즉 이미 ‘혁신의 유전자’를 가진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존 갈리아노의 ‘도발’을 감내할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스카우트 된 뒤 ‘대박신화’를 이룩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가운데)와 ‘구치’와 이브 생 로랑의 톰 포드(왼쪽),‘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도 이번 시즌 주목받는 디자이너다.

에르메스의 장 루이 뒤마 회장은 고티에의 기용 취지에 대해 “앞으로 그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며 “고티에가 에르메스 여성복 스타일의 키포인트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실험성과 전통 사이에서 어떤 절충물을 만들어낼 지는 고티에가 이끄는 에르메스 컬렉션이 첫 선을 보이는 9월이 돼야 알 수 있다.

9월 컬렉션에서는 또 다른 거물급 디자이너의 재기가 기다리고 있다. 5월 23일 ‘컴백’선언을 한 질 질 샌더다. 최근 몇 년간 경영난을 겪는 작은 브랜드들이 구치그룹, LVMH와 같은 커다란 패션 기업에 흡수되는 것이 패션계의 큰 이슈였다. 샌더도 같은 이유로 2000년 프라다 그룹에 합병되었다.

당시 프라다그룹의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프라다 회장은 디자이너이자 오너였다. 샌더에게 디자인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금씩 디자인 영역에도 간섭하기 시작했고 샌더는 이에 항의하듯 합병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잠적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프라다그룹은 후속 디자이너로 밀란 뷔크미로빅이라는 젊고 창의적인 디자이너를 영입했지만 샌더 특유의 ‘깔끔한 라인’을 계승하는 데 실패했다는 평을 받았다. 몇 시즌간 방향타를 잃어 본래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던 브랜드에 샌더 본인이 복귀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근에 새로운 디자이너 기용으로 이슈가 되었던 또 하나의 브랜드로 버버리를 들 수 있다. 2002년 봄, 여름 시즌부터 버버리는 크리스토퍼 베일리를 영입한 이후 더욱 젊은 이미지를 내게 됐다. 버버리는 라틴어로 ‘전진’이라는 뜻이 있는 ‘프로르섬(Prorsum)’ 라인을 만들어 보다 젊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사실 톱 디자이너들이 여러 브랜드로 갈아타는 현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를 영입함으로써 브랜드의 낡은 이미지를 벗고 혁신성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는 1980년대 샤넬의 칼 라거펠트 영입 이후 줄 잇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구치와 이브 생 로랑, 크리스티앙 디오르, 루이뷔통 등이다.

구치는 1994년 미국 디자이너 톰 포드가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되기 전까지 ‘구식’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외면당했다. 하지만 현재의 구치를 보고 진부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포드의 상업적인 마인드가 구치를 유행에 가장 민감하고 현대적인 브랜드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포드는 작년 겨울 같은 구치그룹으로 인수된 40년 전통의 이브 생 로랑의 수석 디자이너를 맡으면서 이 브랜드에도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한 루이뷔통 역시 이 대열에서 빠질 수 없는 브랜드. 원래 루이뷔통은 가방 컬렉션으로 유명하지만 제이콥스의 영입으로 의상 라인에 힘을 얻게 됐다.

이러한 일련의 브랜드 혁신의 ‘대박’으로 디자이너 모셔가기가 패션계에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어느 디자이너가 어느 브랜드로 간다더라’하는 소식은 그 브랜드 컨셉트의 향방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곤 했다. 그만큼 한 브랜드에서 디자이너가 차지하는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트렌디한 디자이너를 모셔갔다고 해서 모두 ‘대박 신화’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샌더와 프라다그룹의 이별과 재회에서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경고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현주 퍼스트뷰코리아 패션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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