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교수 자료집 "北으로 끌려간 언론인은 238명"

  • 입력 2003년 3월 13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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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북한에 납치된 인사 중 신문 통신 방송사에 종사하던 납북 언론인은 모두 238명(피살자 12명 포함)으로 대부분 생사조차 확인이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다.

납북 언론인에 대한 생사 확인과 유해송환운동을 벌이고 있는 대한언론인회(회장 이정석·李貞錫)는 납북 언론인의 전모를 체계적으로 발굴 정리한 ‘돌아오지 않는 언론인들-6·25전쟁 언론 수난사’를 발간했다.

정부가 6·25전쟁 기간에 납북됐다고 밝힌 인사는 모두 8만여명. 대한언론인회와 한국외국어대 정진석(鄭晉錫)교수는 서울시, 대한적십자사 등 5종류의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를 조사해 238명에 달하는 언론인 명단을 발굴하고 유족들의 증언을 모아 납북 언론인 자료를 집대성했다.

납북자 중에는 동아일보 백관수(白寬洙), 조선일보 방응모(方應謨), 한성신문 안재홍(安在鴻), 현대일보 서상천(徐相天) 등 전현직 언론사 사장 11명과 동아일보 장인갑(張仁甲) 이광수(李光洙), 경향신문 신태익(申泰翊), 한성일보 김찬승(金燦承) 등 언론사 전현직 편집국장 등이 다수 포함돼 있다.

1950년 6월25일 남침한 공산군은 불과 이틀 만에 서울로 진격했고 이들은 우선 언론기관부터 장악했다. 공산군은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면서 KBS방송을 이용했고 7월4일부터는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공산군 서울 입성 환영’이란 신문 호외는 현재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서울신문 사옥에서 인쇄됐다.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3개월 동안 동아일보의 경우 인쇄시설로 활용했던 공인사의 인쇄설비가 모두 소실돼 버렸다. 조선일보는 북한군이 뜯어간 윤전기를 훗날 창경궁에서 찾아내 본사 공장에 설치했지만 경향신문은 사옥과 공장이 모두 소실됐다.

6·25전쟁 당시 동아일보는 16명이 납북됐고 1명이 살해되는 등 신문사 중 가장 많은 피해를 봤다. 편집국장 장인갑은 1950년 6월27일 오후 남은 기자들을 지휘해 마지막 호외 300장 정도를 제작하고 무교동의 설렁탕집 실비옥에서 사원들과 이별의 술잔을 나눈 뒤 자택에서 납북됐다.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체육부기자 이길용(李吉用)과 사진부장 백운선(白雲善)도 북으로 끌려갔다. 또한 고려대 총장 현상윤(玄相允), 역사학자 정인보(鄭寅普), 미군정청 대법원장을 지낸 김용무(金用茂) 등 동아일보 출신 인물들도 대거 납북됐다.

방송계에서도 26명이 북으로 끌려갔고 1명은 살해됐다. 당시 국영방송 단일체제로 KBS라디오 방송 하나밖에 없던 시절임을 감안할 때 세계 방송 사상 유례없는 방송인 납치사건이었다.

북으로 끌려간 언론인들 중 일부 저명인사들은 ‘평화통일촉진협의회’라는 어용단체에 소속돼 대남선전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강제노동에 시달리거나 숙청돼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 ‘광복 후 6·25전쟁까지의 언론’ 상황을 상세히 정리한 정 교수는 “이같이 많은 언론인이 체제가 다른 사회로 끌려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며 “지금이라도 정부와 국제기구는 납북 언론인의 생사 확인과 유해 송환에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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